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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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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 히스토리(15) - <TV드라마 악역(惡役)의 역사>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히스토리(15) - <TV드라마 악역(惡役)의 역사>
내용 “악역을 키워야 드라마다가 산다”
-TV드라마 악역(惡役)의 역사-


배우는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물들을 소화해내야 되는 경우가 그들 연기세계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TV드라마의 연기에서는 다양성 못지않게 자신의 이미지가 사실상 고정되는 아이러니가 자주 나타나곤 한다. 말하자면 악역(惡役)전문배우니 간교한 역할 전문배우니 하는 탤런트들이 생겨나는 것 또한 극히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평생을 악역이나 노역만을 해내야 하는 연기자가 있는가 하면, 줄곧 의협심이 강하고 선량하고 멋있는 이미지만을 먹고사는 연기자도 있다. 요컨대 그의 인상과 주어지는 역할에 따라 연기자의 이미지는 자꾸만 굳어지게 마련이다. 가령 연출자가 대본을 받아들고 캐스팅을 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떠올리는 것이 연기자 각자의 인상과 개성과 연기하는 스타일일 것이다. 특히 악역이 등장하면 누가 제격인가부터 골라내려 한다. 그래서 맡게 되는 배우는 “아니 또 악역입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하도 악역만을 맡기니까 어떤 배우는 아예 이름(예명)을 바꿔 나타나서 이제부터는 제발 악역만은 맡기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경우가 TV드라마 역사에서 보면 결코 적지 않았다. 어디 악역배우의 애환뿐이겠는가. 젊을 때부터 노역을 맡아 일찍이 늙은이 취급을 받는 배우도 그렇고, 가정부나 술집 작부나 사기꾼이나 폭력배 역할을 단골로 맡는 배우들은 대부분 그런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연기자 가운데는 의외로 악역을 맡아 완벽하게 소화해냄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힌 배우들도 더러 있었다. 어떤 드라마든 드라마에는 악역이 필요하고 극중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악역을 키워야만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악역을 키워야 드라마가 산다”는 말까지 드라마작법 교과서에 나오겠는가. 한국의 TV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초에 이른바 악역스타로 재미를 톡톡히 본 드라마를 꼽자면 누가 뭐래도 ‘아씨’였다. 한국TV드라마의 일일연속극 시대를 연 대표적인 드라마 가운데 하나이면서, 그 폭발적인 인기로 일약 ‘최초의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이 ‘아씨’에서는 주인공 아씨(배우 김희준)의 남편(배우 김창세, 훗날 김세윤으로 개명)이 바로 악역이었다. 집안은 돌보지도 않으면서 온갖 난봉꾼 짓은 다하고, 아씨의 속을 썩이며 늘 아씨를 구박하고 큰소리만 친다.


예전의 악역들은 그런대로 낭만도 있었고,
순진하고 애교 있는 악역들이어서 기다려졌다


걸핏하면 밥상을 뒤집어엎는 행패는 물론이고, 술과 여자와 각종 잡기(雜技)로 가산까지 탕진하는 인물로 나온다. 전형적인 한국형 가부장제의 악역으로 드라마 시작부터 끝까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아씨의 인고와 희생의 이미지는 이런 악역 남편이 있어서 더욱 돋보일 정도였다. 그 후에 나온 드라마 ‘아로운’(한운사 극본)에서는 결정적인 악역으로 ‘리노우에’라는 일본군(배우 문오장)이 나온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한국인 병사에게 개 흉내를 내면서 군대내무반 바닥을 기게 하고, 자신의 군화바닥까지 혀로 핥게 한다. 그밖에도 한국출신 학도병들을 괴롭히는 갖은 기합과 폭력이 등장하는 등 그야말로 처절한 악질의 극치가 다 나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일종의 대하드라마에서는 특히 육이오전쟁 중 적 치하에서 공산당원들이 완장을 차고 무고한 남쪽 국민들을 괴롭히는 악역들이 드라마마다 나왔다. 그들은 대개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피도 눈물도, 인정사정도 없는 악질들로 이런 악역을 맡는 배우들은 거의 몇몇이 번갈아가면서 출연하는 식이었다. 그 다음에 등장한 대표적인 악역은 또 하나의 국민드라마 ‘여로’의 김달중 같은 인물이었다. 조금 모자라는 남편을 둔 여주인공에 치근대며 음모를 꾸미고, 야비하고 파렴치하게 끝없이 괴롭히는 악역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극중 ‘김달중’역을 맡은 배우는 그 드라마의 악역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당시의 극장 쇼 프로그램에 단골로 초청받는 등 꽤나 바쁘기까지 했다. 그가 악역을 실감나게 하면 할수록 드라마 ‘여로’의 여자주인공(배우 태현실)과 바보 남편인 남자주인공(배우 장욱제)의 안타까움은 날로 더해가고 있었다. 여기에 곁들여 등장한 악역이 그 무렵의 드라마에 가장 흔한 악역의 한 축을 맡았던 악질 시어머니와 악랄하고 교활한 시누이그룹이었다. 이들 배역은 항상 악역이었다. 며느리에게 있어서 좋게 그려지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한때 고부간의 갈등은 안정적인 드라마시청률을 올리는데 아주 필수적인 항목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어쩌면 저렇게 며느리를 구박할 수가 있을까? 마치 한국의 시어머니들은 모조리 며느리를 향한 악행만을 짜내는 심통들인 것처럼 대표적인 악역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지금은 모든 드라마에 악역만 잔뜩
악인 악마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뿐


그러다가 1980년대쯤에 접어들면서 주로 지난 시절의 퇴영적 소재, 즉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 속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드라마들이 시들해지자 악역의 양상도 시대에 따라 진화하기 시작했다. 가령 포악한 남편이나 잔인한 악질기업주가 등장해 ‘악의 축’을 맡거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온갖 거짓과 음모와 악행을 일삼는 악역의 인물, 급기야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일말의 가책이나 거리낌 없이 남을 짓밟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사랑과 진실’에서는 출생신분이 뒤바뀐 걸 알고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를 놓치지 않고 신분위장을 통한 상승효과 노리는 악녀가 나온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악질테크닉을 다 동원하고, 끝내는 가짜가 진짜를 궁지에 몰아넣거나 탄로 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는 한 몸부림을 다 친다. 악역의 행태나 종류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막연히 서로의 처지에 따라 악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과 욕심을 위해서 남을 해치기거나 악의 소굴로 몰아넣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순진한 악인의 시대는 가고 악마의 시대가 온 것이다. 많은 드라마에서 경쟁관계에 있거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는 스타일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 악역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악역이 등장해 이건 가족이 아니라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고, 마치 악인의 경연대회를 보는 것과 같은 드라마를 수도 없이 접하게 되었다. 한때는 기업을 경영하는 자가 온갖 불법과 탈법을 마다않고 범죄를 저지르더니, 이제는 또 재벌2세들이 악의 대명사처럼 여기저기서 나타나 악역인물의 신상품이나 신종브랜드처럼 내보여주기도 했다. 정말 그들이 그럴까. 기업이나 심지어 경찰, 검찰, 의사까지 그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현실성과 개연성이 결여된 악역의 DNA를 가진 자들이 횡행했다. 이른바 막장드라마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자 악역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수준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예전 초기드라마의 정형화 된 스테레오 타입의 악역이 아니라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전체가 따지고 보면 모두 악역이라고 할 만큼 악역의 다양화 내지는 악역의 홍수시대가 되어버렸다. 사기꾼에, 조직폭력배에, 불법 또는 범법집단에, 불륜에, 거기서 비롯되는 출생의 비밀과 도덕불감증에, 따지고 보면 모두가 악인들이고 악역들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약간씩 그 정도나 종류는 다르지만 다들 악역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부쩍 늘어났다. 건강한 가정, 아름다운 인간을 지키려는 드라마나 인물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어졌다. 오로지 악질적인 인물, 악행만을 저지르는 인물, 악역만이 드라마에 나오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비정상적인 드라마세상이 되었다. 어른 아이, 부모 자식, 직장의 동료나 상하관계 할 것 없이, 모두가 악마의 탈을 쓰고 설쳐대는 드라마들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납득이 가지 않는, 리얼리티가 전혀 없는 악역들의 퍼레이드다. 세상이 험악해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현상하고, 악역만이 등장하는 TV드라마들하고 어떤 형태로든 서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일까. 영화나 기타 장르들과 달리 TV드라마의 악역은 주제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경우에만 등장시켜야 할 그야말로 필요악일 수가 있다. 그러나 본시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해야 하는 드라마가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악역을 양산하는 행위만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는 악역마저 보다 더 신중히, 절제된 악역모드가 필요한 시점이 지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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