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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2)-조남사(2)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2)-조남사(2)
내용 ‘불후의 인기드라마와 작가 이야기’
드라마 ‘청실홍실’의 작가 조남사(2)


작가 조남사의 방송계 투신은 육이오전쟁 이전으로 돌아간다.
처음 서울중앙방송국(KBS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에서 방송과 인연을 맺은 조남사는 직원신분이었지만 방송원고를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꿈과 글재주도 있었지만, 그때는 이런저런 방송 글을 쓸 만한 작가라는 분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누구든지 방송원고를 때워야 했다. 아무나 원고를 써대야 했고 시나 소설 등 외부 인사들을 불러와 방송을 꾸려가던 시기였다. 실제로 그 무렵 시인이나 소설가, 동화작가들 치고 조금씩이라도 방송원고를 안 쓴 사람은 거의 드물 정도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글이라기보다는 말(언어)을 다루는 방송원고는 문학을 한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조남사는 방송국 직원의 일보다는 글 쓰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또 그의 취향이자 꿈이기도 했다.
물론 초기에는 드라마보다는 드라마가 아닌 원고가 많았고, 드라마라고 해도 어쩌다 겨우 실험수준의 아주 짧은 단막극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써대야 하는 원고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글을 쓸 인력도 확보되지 않은 데다 뜻밖에 육이오전쟁이 터져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 방송사도 부산으로 옮겨갔다. 전쟁 통일수록 방송은 더욱 중단할 수 없는 것. 사람들은 그나마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전황을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앞서 작가 한운사의 조사에서 잠깐 비친 대로, 그때 피난지 부산에서 작가 조남사가 서울중앙방송국의 명맥을 잇기 위해 작가 최요안과 함께 단 둘이서 써댄 전시(戰時) 방송원고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잘 틈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피난지 부산의 천막 속에서 단막극을 만들어 내보내겠다고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기까지 했다.
이들의 부산피난지에서의 경험은 훗날 방송원고를 쓰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방송 글, 즉 방송에서의 언어는 어떤 것이어야 하며, 방송에서의 작가의 비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 작가 최요안은 당시 유명했던 심야 라디오프로그램 ‘마음의 샘터’를 써서 일약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조남사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당시 미 군정청의 주선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연수를 떠난다.
그리고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그는 드디어 한 편의 드라마를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의 한국방송드라마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어차피 방송에서 드라마를 만들어 내보내야 하는 때가 오는데, 어떤 형태 어떤 내용의 드라마가 바람직한 것인가. 드라마를 통해서 무엇을 줄 것인가. 어떤 이야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메마른 정서를 일깨울 수 있을까. 무엇을 쓸 것 인가. 그때까지 가끔씩 해오던 단막극보다는 연속방송극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그래, 이제부터는 연속극으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주간 단위의 시리즈, 즉 주간연속극 쯤이야 극본과 연기자, 기술의 확보 등 지금의 제작여건으로 할 수가 있겠지.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생활이야기도 좋지만 차라리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정서적인 이야기는 어떨까. 어차피 전쟁으로 뒤집힌 윤리문제도 새로 정립할 겸 예컨대 사랑이야기 같은 애정을 다루는 그런 드라마는 어떨까. 이런저런 궁리 끝에 미국연수에서 돌아오자마자 과감하게 내놓은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연속극 ‘청실홍실’이다.
그러니까 한국방송최초의 연속방송극은 일일연속극이 아닌 주간연속극으로 탄생한 것이다.
최초의 연속극, 최초의 인기드라마

그때가 1956년 12월 2일, 이른바 멜로드라마로 지칭되는 연속극이 시작되었다. 조남사는 이 드라마 이후 방송사 전업작가로 나선다. 물론 그 후에 정식으로 새삼 드라마공모에서 당선되는 절차를 밟기도 하지만 드라마에 전념하는 작가의 탄생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최초의 주간라디오연속극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었다. 라디오수신기도 많지 않던 시절에 ‘청실홍실’이 나가는 시각이면 사람들은 여기저기 라디오가 있는 전파사나 이웃집에 몰려가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 번 작가 한운사의 조사는 계속 된다.

“수복해 가지고 서울에 모두 왔을 때, 사람들은 누구에 의지해서 살았나. 그때 쓴 조남사 당신의 ‘청실홍실’! 누가 뭐라 해도 그 시대의 허전함을 메워준 것은 당신, 조남사란 사람이었어. 뒤이어 ‘산 너머 바다 건너’ ‘동심초’.....하루 세끼 밥을 간신히 먹으면서 마음의 양식을 메꿔간 백성들의 착하디착한 습성....그때 당신은 한국이란 땅덩이 위에서 백성들을 위해서 제일 보람 있는 일을 하던 사람이야.
남사! 그때 왜 당신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그렇게도 많았나. 그때 무슨 재간으로 당구를 그렇게 잘 쳤어? 바둑도 그렇게 잘 두고....당신의 시대, 조남사의 시대가 분명히 그때 있었어.
그때가 그대의 절정기! 그때가 그대 인생의 꽃이었어....지금 아이들이 조남사 이름 석 자를 못 알아본다고 화내지 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법. 이름 석 자 남기면 어떻고 못 남기면 또 어떤가. 당신과 다 일장의 사연이 있었던 성우, 탤런트, 연출가, 작가들, 그들이 여기 와서 이렇게 울어주네. 남사! 잘 가게...잘 가. 나도 곧 갈게.”

실로 엄청난 반응이었다. 단군 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방송극에 귀를 기울인 것은 처음이었다. 드라마에 따라 울고 웃고, 한숨짓고 분노하고, 이토록 안타까워하기는 아마도 초유의 일이었을 것이다. 방송드라마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일주일을 손꼽아 기다려주었다. 그리고는 ‘청실홍실’의 방송시간이 되면 또다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라디오 앞에 몰려들었다. 그 이전까지의 사회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열렬한 성원이었다. 최초의 주간연속극이자 최초의 인기드라마가 되었다.
여기에 또 최초로 연속방송극의 주제가라는 것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너도 나도 그 주제곡을 듣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주제곡이 매회 방송될 때마다 흘렀다.
청실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음_음_음 수를 놓았소.....
이 최초의 주간연속극 멜로드라마 ‘청실홍실’은 다음 해인 1957년 4월 28일까지 무려 다섯달 동안 계속되었다. 말하자면 자그마치 5개월에 걸쳐 온 나라가 드라마 ‘청실홍실’로 몸살을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로 초유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최초의 인기드라마, 최초의 연속극, 최초의 멜로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은 이런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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