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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19)-이남섭(1)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19)-이남섭(1)
내용 온통 눈물로 얼룩진 국민드라마 ‘여로’

한편의 드라마가 이른바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을 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다분히 시청률의 문제다. 드라마의 품질이나 작품성하고는 별개일 수도 있다. 작품성과 시청률을 고루 갖춘 드라마가 나오기란 그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쩌다 국민드라마 소리를 듣는 드라마, 계층에 관계없이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그때마다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가장 강력한 흡인요건은 대중성의 확보다. 대중성은 저속성이나 통속성과는 다르다. 작품성은 낮은데 시청자들이 많이 본다고 해서 시청자들이 다 바보 저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드라마의 대중성은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소재에서든 스토리텔링에서든 주제에서든 정서에서든, 결국 대중성의 확보가 국민드라마 탄생의 비결인 셈이다. 우리 방송에서 텔레비전일일연속극이 시작된 이후 최초의 국민드라마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드라마는 두 말 할 것 없이 TBC-TV의 일일연속극 ‘아씨’였다. 1970년 3월2일에 시작해 다음해 1971년 1월 9일까지 전 국민을 울리고 총 253회로 끝났다. 그렇게 길게 끌고 간 드라마는 그때까지는 없었다. 물론 그 무렵에도 KBS-TV의 일일극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의미 있는 좋은 드라마가 있었다. ‘아씨’만큼은 아니지만 시청률도 꽤 높았다. 그럼에도 ‘아씨’를 국민드라마라고 했지 ‘아버지와 아들’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다. 처음부터 순전히 대중적 인기몰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씨’가 우리의 안방을 중독 시키고 휩쓸고 간 뒤, 불과 일 년 남짓한 1972년 4월에 또 한 편의 국민드라마 KBS-TV의 일일연속극 ‘여로’가 시작되었다.

“또 하나의 국민드라마 ‘여로’의 탄생”

1972년 4월 3일부터 그해 12월 29일까지, ‘아씨’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 약 9개월 동안 전국은 온통 ‘여로’의 몸살을 앓았다. ‘아씨’는 그때 TBC-TV의 네트워크가 서울 부산 등지에 국한돼 있었지만 KBS는 사실상 전국방송망이었다. 그러니 저 시골 방방곡곡까지 수상기가 있는 곳이라면 다 볼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처음으로 명실공이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는 국민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매일 밤 연속극 ‘여로’가 방송되는 시간에는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TV수상기 앞에 몰려드는 건 물론이고, 역시 거리가 텅텅 비고 그 해 여름 전국의 해수욕장에서도 ‘여로’가 나가는 시간에는 백사장이 텅텅 비어있을 정도였다. 1973년에 나온 ‘KBS연감’에서는 시청률 70%라 되어있고, 비공식 시청률 조사로는 무려 80% 이상 90%까지 시청률이 치솟았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전 국민이 다 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드라마 ‘여로’는 굳이 한자(漢字)로 표기하면 ‘여로(旅路)’가 아니라 ‘여로(女路)’였다. 여행이나 여정(旅程)을 뜻하는 ‘여로(旅路)’가 아니라 ‘여자의 길’이라는 의미의 ‘여로(女路)’인데도 사람들은 발음까지 ‘여로(旅路), 여로’ 하면서 다녔다. 그러니까 애당초 ‘여로’는 ‘여자의 길’ ‘여인의 길’인 것이다. 앞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아씨’의 성공을 생각하며 여기서도 그저 소박하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당시는 ‘아씨’를 비롯한 일종의 시대극이 시청자들한테 먹히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TV드라마 속의 한국적 여인상의 변화”

다만 여성은 여성이되 모든 사람들이 지켜주고 싶은 여성 ‘아씨’와는 달리 모성애를 유발시키며, 슬기로움과 중심을 잃지 않는 포용력을 미덕으로 삼는 꿋꿋한 여인상을 그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유교적인 가족제도 밑에서 여인들은 오로지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어느새 현대화의 물결 속에 그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한번 살려보려던 것이 당초 기획의도였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당시의 KBS는 국영방송이었다. 그런 KBS가 작품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런 대중적 눈물을 짜내는 드라마를 기획하고 성공시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로’의 폭발적인 인기와 효과는 국책 중심의 딱딱한 KBS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고, 그야말로 국민의 방송으로 그 폭을 넓히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TV드라마의 기능과 역할은 작품성에만 있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인간본질의 문제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나름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다시 말해 TV드라마는 극히 일부인 특정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불특정다수 대중의 문화와 정서를 담는 매체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의 소재나 주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속 이야기로 얼마나 다양해져야 하는가도 상기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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