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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26)-한운사(1)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26)-한운사(1)
내용 ‘남과 북’ ‘빨간마후라’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라디오와 TV드라마에서 휴머니즘을 말하다

충청북도 괴산은 완벽한 내륙지방이다. 사방이 산으로 감싸여 있기도 하지만 괴산으로 진입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증평인터체인지로 들어가도 되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도 괴산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국도를 따라 괴산으로 들어가는 길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늘 오지로 인식되는 곳이 괴산이기도 하다. 그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에 가면 별로 크지 않은 아담한 2층 건축물이 하나 보인다. 2013년에 문을 연 ‘한운사기념관’이다. 기념관이 위치한 동네는 청안면사무소가 있는 마을로 기념관은 작가 한운사가 태어난 생가 터에 세워졌다. 방송계 인물로는 처음 세워진 기념관이고, 방송작가 특히 드라마작가의 기념관으로는 사상 처음 세워진 기념관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종 문학관이나 기념관이 생각보다 많지만, 라디오와 TV에서 드라마를 쓴 작가의 기념관으로는 최초의 기념관이 되는 셈이다. 드라마의 문화적 가치와 영향력을 비로소 깨닫고 인식한 것일까. 이 기념관을 개관하던 날에는 한국최초로 TV드라마를 연출한 방송계 원로 최창봉과 후배작가 김수현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축하하며 작가 한운사를 기리고 그리워했다. 공군드라마 ‘빨간마후라’를 써서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었고, 그 주제가는 대한민국 공군의 공식 군가로 채택됐으며, 역시 빨간 색깔의 머플러가 한국공군의 상징이 된 인연으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공군의 젊은 군악대가 와서 연주를 하고 기념관 개관식을 더욱 빛내주었다. 바로 그 작가 한운사(韓雲史)는 어떤 작가였으며 어떤 드라마들로 한 때, 한 시절 수많은 국민들을 홀렸을까? 비교적 알차게 전시된 기념관 안에 그가 남긴 육필원고와 작품 관련 기록과 자료들을 둘러보면, 그의 작품세계와 작가적 비중과 향기를 두루두루 느끼고 그의 작품이 갖는 가치와 볼륨을 대충 알 수도 있다. 드라마뿐만 아니다. 주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연재한 소설들과 각종 칼럼과 어록, 자서전과 그가 쓴 다른 인물들의 전기(傳記)와, 각본상을 받은 영화시나리오 등도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러니까 그때가 1960년이었다.

드라마작가 최초로 기념관을 세우다

최초의 라디오연속극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KBS라디오에 주간연속극으로 매주 일요일 밤 ‘현해탄은 알고 있다’라는 드라마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엔 아직도 TV방송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드라마도 단연 라디오드라마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때였다. 사람들은 이제 방송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라디오연속극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자신들의 정서를 가장 접근하기 쉬운 매체에서 매일 또는 매주 연속적으로 방송한 탓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라디오드라마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함께 무한한 상상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한 발짝 더 앞서서 한운사의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작가 특유의 체험이 바탕에 깔린 로맨틱한 색깔이 더 오묘한 재미로 다가왔다.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멋도 빼 놀 수 없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일으킨 소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학병으로 강제 징집된 식민지 한국의 엘리트젊은이가 일본 본토의 병영에서 온갖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전쟁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처참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를 일본여성과의 운명적인 사랑에 깊이 빠진다. 마침내 대대적인 공습이 지나가고 주변이 초토화 되었는데, 그 전쟁의 폐허 속에서 끈질기게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어서는 한 목숨이 있었으니....작가는 일제강점이라는 야욕을 고발하기보다는 나름의 휴머니즘과 낭만을 그린 것이다.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지나간 세월의 전쟁과 비인간적인 핍박에 대해 쓰지 않고 있을 때였다. 더군다나 휴머니즘과 로맨티시즘의 눈으로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작가 한운사가 라디오드라마로 해낸 것이다. 한 마디로 놀라운 청취율을 올렸다.

실제경험의 드라마 ‘현해탄.....’시리즈

사람들은 다음해 1961년까지 매주 일요일 밤마다 라디오가 있는 곳이면 이웃이든 전파사든 아무데나 찾아가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들었다. 터무니없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고급스런 인간본질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거기 있었다. 이 단 한편의 드라마는 방송드라마 계에 있어서 작가 한운사의 화려한 등극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른바 지식층 내지는 식자층까지를 자연스럽게 드라마의 고객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경우가 되었다. 물론 드라마를 통한 ‘한운사 문학’의 향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일본주오(중앙)대학교와 서울대 불문학과를 거치면서 철학과 문학수업을 했었다. 그리고는 아르바이트 삼아 방송에 뛰어들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어려운 철학과 문학성을 어떻게든 쉽게 풀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철학과 문학을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시작한 끝에 써낸 첫 드라마가 바로 ‘현해탄은 알고 있다’였다. 일테면 한운사드라마의 방향타가 된 셈이다. 이 드라마는 인기도 인기였지만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제작되어 엄청난 흥행몰이를 했다. 김운하라는 신인배우를 과감하게 기용했고, 역시 재일교포 출신의 신인여배우를 뽑아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한동안 순전한 허구가 아닌 주로 실제상황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드라마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48년부터 약 10년간 KBS라디오가 청취자 제보 등을 극화한 ‘인생 역마차’를 쓴 경험이 확신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이 프로그램 역시 당시로서는 무려 10년간 청취율 최고였다. 그리고 1959년 CBS기독교방송 라디오에서 일종의 방송소설 형식의 ‘어느 하늘 아래서’를 써서 큰 반응을 얻었다. 그때는 방송이 KBS와 CBS 단 두 군데뿐이었다. 이 ‘어느 하늘 아래서’는 육이오전쟁으로 인한 상이군인과 헌신적인 아내 이야기로 역시 실존인물이 모델이었다. 청취율도 높았고 영화화도 되었지만 라디오드라마로서는 최초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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