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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59)-피 말리는 드라마연출의 뒷이야기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59)-피 말리는 드라마연출의 뒷이야기
내용 피 말리는 드라마연출의 뒷이야기
-경력 30년 넘은 ‘K’ PD의 경우


스탠바이! 10초전, 5초전, 큐!....뭐 이러니까 드라마 연출이 꽤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연출자는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법석을 피운다. 몸만 바쁘고 정신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바쁘고 뒤숭숭하다. 평소 인격수양이나 성격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연출자라면 누구나 긴장하게 마련이고, 여유를 갖기가 그렇게도 힘들다는 것이 대부분의 연출자들이 하는 고백이다. 가령 KBS에서 무려 35년 가까이 TV드라마 연출을 한 어느 PD의 표현을 빌리자면 꼭 생리주기 때 여자들의 심리 같단다.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드디어 녹화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그 긴장감이 극도에 달해 드라마 외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다. 그때부터는 ‘ㅇㅇ씨’ 등의 존칭이나 존댓말은 아예 사라지고, 그저 고함과 막말과 울화통만 팍팍 쏟아내기가 일쑤라는 얘기다. 글쎄 그건 옛날 얘기고 요즘은 많이 달라져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도 있지만, 연출자가 갖는 긴장감의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고함과 막말과 신경질에 가까운 울화통의 뒤범벅은 결코 사라졌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 제작을 앞두고 연출자가 해대는 형태가 여성생리현상과도 같다고 말한 바로 그 KBS의 ‘K’PD가 남겨 논 비화(秘話)에 따르면, 자신의 경우 녹화테이프가 돌아가는 순간 어디선가 대본에도 없는 아기울음소리가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소품담당이 누군데 저 따위 소품을 구해 왔어?”
여기서 말하는 소품은 말할 것도 없이 갓난아기다. 연출자 K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흥분한 상태로 아래 스튜디오로 뛰어 내려갔다.


고함과 막말과 긴장과 울화통의 뒤범벅
순간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연출의 세계


그날 드라마에 출연시키려 데려온 철없는 갓난아기가 그만 앵앵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기울음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홧김에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허둥지둥 젖을 먹이며 안절부절 하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자 누가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해서 제작을 중단시키느냐며 발끈해서 뛰어 내려온 PD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더란다. 돌아앉아 젖을 입에 물린 아기엄마는 연신 미안해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까짓 드라마연출이 뭐라고 작업에만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남의 집 귀한 핏줄인 갓난아기를 한낱 소품 취급이나 하고 고래고래 고함이나 질러대고....스스로의 고약한 마음씨에 속으로 깊이 후회까지 했다는 일화다. 탁한 공기 속에 스튜디오의 따가운 조명까지 받아가며 밤중까지 기다려야 하는 아기와 아기엄마의 처지가 얼마나 안쓰럽게 느껴졌던지 그날 내내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내가 미쳤군. 난 인간도 아니야.” 뭐 이런 생각이 절로 들더라는 것이다. 남의 집 갓난아기를 한낱 소품으로만 생각하다니! 일당이라야 당시 돈으로 겨우 천원 밖에 안 되지만 어찌 됐든 약속을 했으니 데리고 나왔을 뿐인데 그걸 내 작업생각만 하고 신경질로 대하다니 말이나 되는가. 근데도 연출을 맡아서 하는 순간만은 드라마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일 정도로 긴장하고 몰입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0년도에 무려 1백 50회나 방송이 된 대하드라마를 연출할 때, 작가의 원고가 늦어 겨우 밤중에야 내일 아침 녹화를 위해 콘티를 짜고 있었다. 물론 이때에도 당장 녹화에 들어가야 할 드라마 외에는 아무런 경황이 없었다. 어쩌든지 내일 녹화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뿐인데 하필이면 그때 집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전화목소리는 다급했다. 그 밤중에 아내가 해산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실려 갔으니 즉시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그때 아기를 낳으려고 병원으로 간 아내 걱정은커녕 내일 아침 녹화 때문에 정신없이 초조해 하는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래서 전화기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수화기를 내팽개쳤다.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했다.


한편의 드라마를 만드는 동안 연출자는?
오로지 작품생각만! 그들에게 일상은 없다


“낳든가 말든가 맘대로 하라고 해! 난 지금 여기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안방에서 한편의 드라마를 지극히 편안한 자세로 보기도 하겠지만, 정작 그 드라마를 만드는 연출자들의 세계는 매 순간이 일상의 눈으로 본다면 절대로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초조하고 집중해야 하는 오로지 긴장의 연속인 것이다. 그러니 걸핏하면 고함이고 존대나 존칭은 생략하는 막말이 튀어나오고, 발끈하고 울화통이 치밀고, 그야말로 매 순간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분위기로 연출의 세계는 흐른다. 지나고 나면 순한 양이 되고, 수줍어서 함부로 말도 못하는 주제에 연출만 맡으면 자기가 무슨 큰 예술이나 하는 것처럼 뛰고 솟고 한다는 이야기다. 남의 집 갓난아기를 소품취급이나 하고, 그 애를 달랠 생각보다 짜증부터 내고 불같이 스튜디오로 뛰어 내려가는 모습들이 순간순간 한심하다고 느끼면서 또 다시 연출만 맡으면 야수로 변한더라고 한다. 밤중에 아내가 아기를 낳으려 병원에 실려 갔지만 결국 다음날 그날 작업을 다 끝내고 녹화 테이프를 넘기고서야 병원으로 달려 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아내한테 싹싹 빌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병원 수위들끼리 그냥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어이, 어젯밤 밤중에 실려 온 그 703호 산모 뭐 낳았어?” “응, 딸인가 봐. 남편이란 작자가 뭐하는 놈인지 혼자 낳았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농담도 아니고 잡담도 아니고 아무런 관심 없이 내뱉는 사무적인 말투로, 그들 역시 남의 집 귀한 첫딸을 지극히 직업적이고 습관적으로 마치 연출인 자기가 우는 갓난아기를 소품 취급했듯이 그러고 있더란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돌아서서는 그 다음 작품 연출을 맡았을 때 과연 그가 개과천선하고 달라졌을까.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새삼 확인할 길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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