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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 인문학(63)-신봉승이 사극 작가가 된 까닭은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63)-신봉승이 사극 작가가 된 까닭은
내용 ‘역사의 강물에 빠지며 허적이며’
신봉승이 사극작가가 된 까닭은


1972년 어느 날, 당시 동양방송(TBC-TV)의 PD 김재형(2011년, 75세로 작고)이 작가 신봉승(辛奉承)을 찾아와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런 것이었다. “형님, 저하고 사극(史劇) 한편 합시다.” 그때 신봉승은 “당신, 돌았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미 수 십 편의 영화시나리오를 썼고, 그것도 주로 국산멜로영화의 시나리오를 집필해온 작가로, 당시 문공부가 실시한 현상공모에서 ‘두고 온 산하’로 당선된 이후 라디오드라마까지 쓴 작가였지만 갑자기 텔레비전역사극이라니!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역사극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라고 아무 거나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사극이라면 적어도 역사에 대해 기초적인 관심이라도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신봉승은 사양했다. 하지만 그의 사양은 오래가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방송사의 접근은 집요했고 결코 슬그머니 물러날 자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일 년 전인 1971년에 신봉승이 임희재 원작의 철종 이야기 ‘상감마마 미워요’를 TV드라마로 각색했고, ‘양반전’까지도 TV드라마로 선보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또 하나의 미끼는 당시 TV사극을 쓰고 있는 작가들의 나이가 이미 많다는 것. 대표적인 사극작가로 라디오드라마 때부터 그 분야의 대가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서구씨였다. 훗날 TV사극의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로 훗날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진 저 유명한 ‘장희빈’ 스토리를 발굴했고, ‘강화도령’ 등의 숱한 이야기 소스를 만들어낸 작가다. 그리고 ‘민비’ ‘영친왕 전하’ ‘왕비열전’ 등을 쓴 김영곤이 있었다. 이서구는 원래 언론인 출신 작가였고, 김영곤은 역사교사 출신이었다. 이서구는 그 당시 이미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김영곤은 실제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워낙 노인행세를 하는 노숙한 인상이라 사람들이 벌써 노인으로 분류하고 있을 때였다. 자아 이들이 물러나고 나면 그때 사극은 누가 써야 할 것인가? 바로 이 부분을 내세우며 자극한 것이다.


그냥 지어내는 이야기나 쓰고 싶었는데
어느 새 정통사극작가로 우뚝 솟았으니


그것이 방송사가 신봉승을 역사드라마 작가로 불러들이는 가장 확실한 명분이며 결정적인 유혹의 손길, 매력적인 구실이었다. 그래서 TBC-TV를 통해 맨 먼저 하게 된 TV사극은 연산군의 일대기를 그려가는 ‘사모곡’이었다. 매일 15분짜리 일일연속극으로 김세윤, 고은아 등이 주연을 맡았고 1972년 8월 27일부터 이듬해 6월 29일까지 거의 일 년 가까이 방송되었다. 처음 이 연산군 이야기를 쓰기로 하고나서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명색이 사극인데 사료(史料)도 찾아야 하고 고증도 맞아야 하고. 결국 신봉승은 한 지인을 찾아가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는 책 이름을 듣게 된다. 그 국역본을 구해서 읽어보니 내용은 여기저기서 듣고 배워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그로부터 신봉승은 사실(史實)과 비교적 상관없는 이른바 창작사극이라는 것에 먼저 도전한다. ‘조선 여인 5백년’ 시리즈가 그때 탄생한다. ‘연화’ ‘윤지경’ ‘인목대비’ ‘별당아씨’ ‘임금님의 첫사랑’ 등으로 이어진 그의 사극은 시청률 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사실상 신봉승의 사극도 그전의 사극작가들, 이서구 김영곤 등이 썼던 전설이나 야담수준의 구수한 역사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높은 시청률을 올리면서도 한편에서는 역사인식과 고증이 제대로 된 정통사극이 아니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이런 불만은 작가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허전했다. 이제는 곁가지가 아닌 본줄기에 매달리고 싶은 욕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통사극의 틀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정사(正史)사료에 과감히 도전했고, 따라서 드라마와 함께 학문적인 탐구를 병행하기로 다짐한다. 그 작업의 하나가 국보151호인 ‘조선왕조실록’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그는 오랫동안 활동했던 TBC를 떠나 MBC-TV의 사극연출자 표재순(表在淳)을 만나게 된다. 처음 그들은 ‘단종애사’를 기둥줄거리로 삼아 ‘고은님 여의옵고’와 같은 내용을 드라마로 하되, 다만 그때까지의 사극에서 사이드로 다룬 ‘신숙주와 한명회’라는 두 인물에 초점을 두기로 한다.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일본에 끌려간 도공(陶工)들의 이야기 ‘타국’과 ‘간양록’, 을사늑약으로 목숨을 던진 면암 최익현 등을 드라마로 되살려내는, 말하자면 근대사까지 섭렵하는 사극들을 만들어낸다.


대하역사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
비로소 역사를 체계적으로 극화


그 사이 KBS로 가서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 이성계의 ‘왕도’도 사극으로 만들었고, 다시 MBC로 와서 프랑스외교관과 기생출신의 한국여성과의 사랑을 다루며 대한제국 말기의 외교사를 일부 점검할 수 있었던 특집극 ‘이심(梨心)의 비련기’도 이때 방송되었다. 이 과정이 사극작가로서의 신봉승에게는 사극을 단순한 오락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진정성으로 써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던 때였다. 드디어 신봉승에게 기회가 왔다. 1983년 MBC-TV가 대하역사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의 제작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태조 이성계로부터 고종황제까지 전체를 체계적으로 다루자는 실로 야심 찬 역사드라마 기획이 그동안 공부를 많이 해온 작가 신봉승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저것 찔끔찔끔 야사 중심의 드라마가 아니라 정사(正史)를 뼈대로 하는 정통사극을 꿈꾸었다. 이제 신봉승은 지나간 역사 속의 구수한 이야기나 풀어내는 그런 사극작가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파고들어 역사탐구에 진력했고, 그 결과 어느 역사학자에게도 결코 뒤지 않는 역사의식과 나름의 해석과 사관(史觀)까지 갖추게 된 깊이가 있었다. 적어도 조선왕조에 관한 한 그의 식견을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정통하게 되었다. 1983년 3월 31일 제1화 ‘추동궁마마’를 시작으로 신봉승의 대하역사극 ‘조선왕조 5백년’은 뚜껑을 열었다. 그 후로 ‘뿌리 깊은 나무’ ‘설중매’ ‘풍란’ ‘임진왜란’ ‘남한산성’ ‘인현왕후’ ‘한중록’ ‘파문’ ‘대원군’ 까지 계속되었다. 1990년 12월 23일 제11화 ‘대원군’에 와서야 막을 내렸으니 장장 7년 9개월간의 대 장정이었다. 물론 신봉승이 쓴 ‘조선왕조 5백년’의 대하역사드라마 속에 나왔던 이야기들은 그 가운데 일부를 빼내 훗날 다른 사람들이 다시 드라마로 제작하는 예가 많았다. 그 기나긴 스토리텔링을 일차 신봉승이 해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1세대사극작가들의 대를 이어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나 해볼 생각에서 시작했으나, 점점 역사의 강물에 빠지며 허적일 때마다 역사에 대한 작가 신봉승의 안목이 깊어지면서 끝내는 역사학계도 뺨치는 정통사극작가로 우뚝 섰다. 그런 신봉승도 지금은 나이가 많아 역사드라마를 쓰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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