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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70)-실화와 실존인물중심의 시대성 드라마작가, 작가 김기팔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70)-실화와 실존인물중심의 시대성 드라마작가, 작가 김기팔
내용 <드라마작가 김기팔>

마치 투사처럼 시대와 맞서다
실화와 실존인물 탐구를 드라마로 쓰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다 신 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시던 북녘 고향 저만큼 보이는 이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온전히 걷히지 않은 어둠을 지켜 끝내는 다가올/
찬란한 대낮으로 증거하시라.....

얼핏 보면 마치 무슨 민주투사에게나 바치는 헌사 같은 분위기다. 쓰기를 ‘오적’의 시인 김지하가 썼다면 조금은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지만, 무심코 그냥 봐선 이걸 누가 드라마 쓰는 작가에게 바치는 비문(碑文)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버젓이 비석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다. 쓰는 걸 내팽개치고 길거리에서 무슨 민주화투쟁이나 벌인 작가도 아니었는데 그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공식명칭도 ‘김기팔 통일염원방송비’이다. 두고 온 산하, 이북 출신의 실향민이어서 그런지 비가 세워진 곳도 통일로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통일로변의 장곡공원 안에 드라마작가 김기팔의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1993년 12월 연말의 일이었다.
생전에 작가 김기팔(金起八)과 유별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그의 작품에 감복했거나 그의 인간적 풍모에 매혹되었거나, 그의 사회적 문화적 업적에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건 다 동의해도 ‘그의 인간적 풍모에 매혹되었다’는 대목에선 웃는 사람이 다소 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평범하지가 않았다. 때로는 괴팍했고, 때로는 엉뚱했고,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았고, 때로는 야생마 같았고, 때로는 정의의 투사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울기도 했다. 드라마작가 김기팔! 그는 오로지 작가였을 뿐이다. 작품으로 말하려 했고, 결코 작가정신을 굽히거나 팔아먹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친지나 지인 가운데는 작가 김기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로 그를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못난 것, 저속한 것, 유치한 것, 열등한 것, 가짜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수한 것, 참된 것, 당당한 것, 진짜만을 바랐다. 그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만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권력이나 금력에도 굴하지 않고 고고한 기개를 지켰다.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그는 지식인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인식했고, 특히 TV방송드라마의 기능이 어떠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던 그런 사람이었다.....”

방송드라마의 역할과 기능을 정확히 인식

그래서 그는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정치드라마, 사회고발드라마를 개척해 사회적 파문과 함께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휴먼다큐 또는 인간다큐드라마를 진지하게 쓴 것이다.
가짜를 인정하지 않고 진짜만을 바랐기 때문에 엉터리로 지어내기 보다는 실존인물들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마치 목숨을 건 검투사처럼 그렇게 드라마를 썼다. 다시는 드라마를 안 쓸 사람처럼, 더 이상 다음 작품은 안 써도 좋다는 식으로 매번 그 드라마에 충실했다. 본명 김용남, 1937년 평양 출생, 공주중학교와 서울중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데뷔 무렵 ‘칠전팔기(七顚八起)’한다는 의미로 이름조차 김기팔(金起八)로 바꾸고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처절하게 겪어나갔다. 그는 좀처럼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작가로 태어났다.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중성도시’ 당선, 1960년 KBS 1백만환 현상 라디오드라마 공모에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함으로써 이후 방송드라마작가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는 1969년 잠시 신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훨씬 기자보다는 작가가 맞았다. 그는 라디오와 TV의 방송드라마에서 주로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다뤘다. 어떤 인물이든 작가 김기팔의 손에만 들어가면 참되고, 못나지 않고, 당당하고,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작가였다. 그래서 김기팔이 필봉을 휘두르면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대중과의 영합을 철저하게 거부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곧장 인기작가로 발돋움했다. 1991년 그가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해 12월 25일자 어느 일간신문의 칼럼에서는 드라마작가로는 보기 드물게 ‘어느 작가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작가 김기팔의 작가정신과 그가 남긴 드라마에 대한 이런 글이 실렸다.
“그의 독특한 현실관, 인생관, 세계관이 사람들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을 감싸주고 긁어주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가 그렇듯 그의 생활신조도 힘센 쪽, 가진 쪽, 옳지 못한 쪽을 철저히 배격하고 약한 쪽, 옳은 쪽을 옹호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방송국 쪽에서 소외받고 있었던 많은 연기자들이 그의 강력한 입김으로 유명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그의 생활신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나 도로보 데쓰”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이다. “민나 도로보 데쓰!” 모두가 도둑놈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모두 도둑놈들이야!” 또는 “야, 이 도둑놈들아!” 하지 않고 하필이면 왜 일본말로 “민나 도로보 데쓰”라고 했을까. 그때가 1980년대 초, 정확히 말해 1982년 MBC-TV에서 ‘거부실록(巨富實錄)’이라는 드라마시리즈를 작가 김기팔이 쓰고 있었다. 평양갑부 백선행(여자), 제주부자 김만덕(여자), 그리고 ‘공주갑부 김갑순’(남자) 편에서 문제의 이 일본말 대사가 방송을 타자 삽시간에 유행어가 되었고, 드라마의 인기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우리 TV드라마에서 버젓이 일본말을 써도 좋은가 하는 논란과 함께. 그러나 오히려 1980년대 초라는 당시의 혼란하고 혼탁한 세태를 비교적 적절하게 풍자한 표현이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때는 이른바 신군부라는 세력들이 정권을 사실상 찬탈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주인공인 공주갑부 김갑순은 일제 강점기를 거친 돈밖에 모르는 무식한 실재인물이었다. 저 험난했던 일제 강점기부터 오로지 돈을 모으는 것 밖에 모르는 그런 인물로, 그 인물의 입을 통해 세상에다 대고 “민나 도로보 데쓰” “모두 도둑놈들이다” 한 것이다. 그 시절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 특정인들을 향해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주인공 김갑순 역은 탤런트 박규채가 맡았다. 박규채야말로 그 전이나 그 뒤에나 그다지 주연을 맡을만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거부실록’의 ‘공주갑부 김갑순’ 편에서 당당하게 주연을 맡아 예의 그 유명한 유행어 “민나 도로보 데쓰”를 매 회마다 상표처럼 외친다. 김기팔의 드라마가 거의 다 그렇듯 일반적으로 주연급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를 주인공 역으로 쓰는 경우는 드물었고, 이 공주갑부 김갑순 역도 마찬가지였다. 무식하고 힘들게 돈을 모아 나중엔 좋은 곳에 크게 쓸 줄도 아는 거부들을 통해 인간을 그려가는 드라마들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공주갑부 김갑순’은 이미 유행어가 말해주듯이 특유의 시니컬한 통쾌함으로 인기를 모았다. 드디어 ‘김기팔드라마’의 진수를 보는 맛을 사람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필봉을 휘두르다

정말 김기팔은 전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드라마의 대사 하나라도 걸리면 잘리는 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쓰고 싶은 드라마를 맘대로 썼다. 덕분에 무려 여덟 차례나 김기팔의 드라마는 중간에 방송이 중단 되는 아픔을 겪었다. 라디오드라마 ‘데이신다이(挺身隊)’ 열정을 다한 정치다큐드라마 ‘정계야화’, 그리고 TV드라마 ‘땅’ 등이 대표적인 강제로 잘린 조기종영 드라마들이었다. 때문에 혹자는 그의 드라마가 용두사미라는 악평까지 했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시작은 늘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거창하게 문을 여는데 얼마 안 가서 흐지부지 드라마가 사라진 경우가 잦아서다. 김기팔은 결국 중간에 붓을 꺾고 방송드라마 계를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모친이 가업으로 운영하고 있는 동대문시장 단추장사나 하겠다고 잠시 떠난 적도 있었다. ‘데이신다이’는 훗날 ‘군대위안부’라는 공식명칭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한일관계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정치권의 압력으로 방송을 하다가 흐지부지 중단되었다. ‘정계야화’는 권력기관의 경고와 탄압을 받으며 두 번이나 중단되었다가 살아났다가 신군부의 방송통폐합으로 사라졌다가 컬러시대에 다시 TV드라마 ‘제1공화국’으로 되살아나 그나마 조기종영의 아쉬움을 조금 달래주었다. 그리고 ‘땅’ 그가 최종적으로 권력에 도전하려했지만 역시 당시 방송환경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거부실록’ 중에서도 ‘공주갑부 김갑순’만은 달랐다. 우선 정치적인 냄새가 겉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그저 돈만 긁어모으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였으며, 거기다 “민나 도로보 데쓰”란 일본말 유행어가 너무 급속히 퍼져나가서 미처 손 쓸 사이가 없었다. 한편 그는 이 드라마를 통해 세상에다 대고 “야, 이 도둑놈들아!” “모두 도둑놈들이야!” 하고 외칠 수가 있었다. 인간의 끝없는 사리사욕과 욕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한 마디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빗대어 정치권력의 속성을 비웃는 작가의 철학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 김기팔은 작가의 철학과 의식과 정신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셈이다. 작가가 글을, 드라마를 왜 쓰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결정적 한 마디가 “민나 도로보 데쓰” 즉 “모두 도둑놈들이야!”였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불후의 인기드라마로 남았다. 작가의 색깔이 드러난 비교적 성공한 드라마였다.

인기TV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은 어디서 왔나

사실 ‘김기팔드라마’의 인기는 ‘거부실록’ 이전으로 돌아간다. MBC-TV에서 방송된 ‘거부실록’이 1982년에 나왔는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주목을 끈 김기팔의 드라마는 바로 한 해 전인 1981년에 MBC에서 방송한 ‘제1공화국’이다. ‘제1공화국’은 다큐멘터리드라마이고 정치드라마다. 그때까지만 해도 TV드라마는 사회성이나 시대와는 별개의 고작 허구의 사랑이야기나 홈드라마나 하는 것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작가 한운사가 라디오에서 최초로 ‘잘돼갑니다’라는 정치드라마를 선보였고, 또 TV에서 역시 작가 한운사가 ‘박마리아’라는 자유당 시절 정치이면사를 그리는 드라마를 쓰다가 중단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비교적 픽션 쪽이 강했다. 그러나 김기팔의 정치드라마는 달랐다. 픽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팩트에 바탕을 둔 철저한 다큐드라마였다. 다만 사실 그대로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작가의 시각과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드라마로 만들었다. 인간을 그리되 허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살았던 실존인물의 경우를 가능하면 정확하게 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김기팔의 다큐드라마였고, 이를 시작으로 시대성과 사회성이 함께 들어있는 드라마에 사실상 승부를 걸었다. 텔레비전으로 ‘제1공화국’이라는 드라마가 나가자 사람들은 우선 정치드라마라는 데에 흥미를 느꼈고, 그때까지 보도로만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들이 배우들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곧 김기팔드라마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로 나타났다. 가령 그 무렵 이른바 국민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TV드라마 ‘아씨’나 ‘여로’처럼 국민적 눈물을 짜내며 시청률을 올린 한 많은 여인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들하고는 방향이 사뭇 달랐다. 그야말로 격동의 현대사를 드라마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탐구는 라디오 시절 ‘이 사람을!’이란 프로그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녹음기를 메고 전국을 누비면서 실제인물들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그들의 육성을 재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멕시코 이민의 애환을 추적한 드라마 ‘유카탄아리랑’과 외국인이 남긴 조선여행기를 재구성한 드라마 ‘한국찬가’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고도 바로 정치드라마로 들어간 건 아니다. 1963년에 라디오드라마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지다’를 쓰고, 1974년에는 재미동포 이야기 ‘제이슨 리’를 쓴다. 바로 이 무렵을 전후해서 1970년부터 1980년까지 10년 동안 라디오의 정치다큐드라마 ‘정계야화’에 줄곧 매달린다. 그때 이미 라이벌 라디오방송사에서는 ‘광복 20년’이란 다큐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는 지나간 정치얘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가 중심이지만 사회문화 분야까지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실대로만 다뤘다. 그리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김기팔의 ‘정계야화’는 달랐다. 순전히 정치만을 다루되 작가의 역사관 내지는 비판적 시각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픽션’보다 ‘팩트’가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예컨대 해방 이후 자유당 시절까지 정국을 주도해 온 이승만, 김 구, 조병옥, 신익희, 조봉암, 여운형, 조만식, 이기붕, 심지어 미 군정청 관계자들까지 정계 거물들의 이미지를 배우의 분장으로 재현해냈다. 그리고 숨 막히게 돌아가는 권력세계의 쟁탈전과 이념의 갈등까지 작가의 눈으로 풀어냈다. 이승만의 떨리는 말투와 행동과 모습, 주요 인물들의 생각과 활동반경까지 실제인물을 보듯이 형상화 해내는데 성공했다. 정국의 소용돌이를 정확하게 짚어 나갔다. 그때까지 소설이든 영화든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작가 김기팔은 흔해 빠진 드라마 속에서 지어내는 허구의 인물보다 워낙 실존인물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라디오나 텔레비전드라마가 시대성과 사회성을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쓸 것인가에 대해서 하등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 정파의 눈으로 보거나 편향된 시각으로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온 인간들을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공정하게, 편향된 시각 없이 쓴다는 김기팔의 작가의식은 그가 픽션보다는 팩트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표현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다큐멘터리 정치드라마의 한 영역이 그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동양방송의 ‘광복 20년’은 가급적 있는 사실 그대로를 충실히 전하려는 편이었으나 동아방송에서 방송된 김기팔의 정치다큐멘터리 ‘정계야화’는 달랐다. 다큐드라마이지만 작가의 창작력을 더 중시했다고나 할까. 작가의 주관과 시선이 다소 입혀진 색깔 있는 정치다큐드라마로 차별화 했다. 이것이 김기팔 정치드라마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어디까지나 사실에 입각한 다큐멘터리를 유지하면서 작가의 판단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드라마의 역할에도 충실했던 것이다. 바로 그 ‘정계야화’의 정신을 TV드라마 ‘제1공화국’으로 가져갔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김기팔의 다큐드라마, 특히 정치드라마를 눈 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대든 한 시대가 ‘분노할 줄 아는 작가’를 가졌다는 것은 축복에 속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더욱이 1970년대 중후반은 소위 유신정치가 극성을 떨던 때라, 그때 그 무렵 ‘정계야화’의 4.19 전야 부분에서 나간 내레이션은 사람들의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번 쥐면 그토록 놓기 싫은 것인가. 그럼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일 계속하겠다는 예고는 지켜지지 않았다. 여기서 다큐멘터리드라마 ‘정계야화’는 중단되고 작가의 ‘내일’도 풍비박산 사라져버렸다. 문제의 드라마는 살아났다가 사라지는 등 겨우 겨우 명맥을 이었다 말았다 부침을 거듭한다. 이 시기에 김기팔은 감연히 붓을 꺾고 1970년대가 다 가도록 동대문시장판에서 어머니가 하던 단추장사를 물려받아 한동안 지내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히 돈은 벌지 못하고 술만 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는 1980년대 초에 들어서자 텔레비전에서 또 다시 정치드라마로 ‘제1공화국’을 내놓은 것이다.

실존인물 캐릭터와 연기자들의 이미지

동아방송의 라디오정치드라마 ‘정계야화’의 이승만 역은 성우 ‘구 민’이었다. 실제의 이승만 목소리와 흡사하게 연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특징을 살려내 이승만의 이미지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개성을 살리는 작업에 있어서 ‘정계야화’는 성공했다. 특히 ‘정계야화’에서는 이승만 못지않게 야당 정치거물들의 이미지 창출에도 무게를 실었다. 그들을 한 번도 직접 만나거나 곁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그들의 어투와 말소리만 들어도 누구라는 걸 구별할 수 있도록 개개인의 특징과 정확도에 초점이 맞춰졌다. 드라마의 인물이란 곧 그 인물의 캐릭터를 말하는 것으로, 김기팔의 정치드라마에서는 각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일단 목소리로 자신들의 성격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인물다큐드라마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김기팔은 풍부한 자료와 문헌 섭렵을 통해 시대성과 동시에 정확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비단 정치드라마 뿐만 아니다. 저 멕시코 이민의 애환을 추적한 드라마 ‘유카탄 아리랑’과, 소위 일본군대위안부를 다룬 드라마 ‘데이신다이’(정신대:挺身隊)에서도 그랬지만 가능한 한 정확한 캐릭터를 살리려 했다. 라디오의 ‘정계야화’에서는 성우 구민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 역을 해냈지만 목소리 뿐 아니라 얼굴까지 적나라하게 내밀어야 하는 TV드라마에서는 누가 과연 이승만을 맡아야 할 것인가. 실재인물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드라마의 인물로서도 새롭게 부각될 수 있는 그런 연기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그 역할을 탤런트 최불암이 맡았다. ‘제1공화국’에서의 배우 최불암은 배우 최불암이면서 초대대통령 이승만이어야 했고, 초대대통령이자 정치인 이승만이면서 연기자 최불암이어야 했다. 탤런트 최불암은 바로 그런 이미지 굳히기에 성공한다. 실재했던 이승만보다 최불암이 더 ‘이승만스럽게’ 인물의 성격을 육체 화 해냈다는 말까지 나왔다.
“아아 이승만이 저런 인물이었군. 저랬군 저랬어.”
사람들은 저마다 TV드라마 ‘제1공화국’을 통해 초대건국대통령 이승만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만한 거물정치인들의 모습을 다들 나름대로 만나볼 수 있었다. 당시의 여당과 야당, 여당정치인들과 야당정치인들이 ‘때로는 대결하고 때로는 타협하는 정치사를 사건별로, 쟁점별로 추적하고 신랄하게 비교분석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현대사를 뒤돌아보게 해주고, 나름의 발전적인 민주의식을 고취시켜나갔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 김기팔은 마냥 막무가내고 강하기만 한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평소 작품에서 보이는 뚝심과 덩치와는 달리 오히려 울기를 잘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울분을 토하다 보면 굵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주제는 “이 놈의 세상!” “모두 도둑놈들이야!”였다.

“헐리웃 풍의 낡고 거짓에 찬 기법들은 가라”

김기팔의 TV드라마 가운데 TBC-TV를 통해 방송된 것은 1968년 단막극으로부터 시작해서 1971년 ‘두 나그네’까지다. 그 뒤 1981년의 ‘제1공화국’부터 ‘거부실록’ ‘단재 신채호’ 1983년의 ‘야망의 25시’까지는 MBC에서 나갔고, 1983년에 잠시 KBS로 가서 ‘아버지와 아들’을 쓰다가 다시 1985년 MBC로 와서 ‘억새풀’을 썼다. 이 경우는 강인한 한국의 여인상이었다. 한 많은 일생을 눈물범벅으로 살아가는 그런 나약한 측면이 아니라 굳세게 자신의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강한 한국의 여인을 그렸다. 그리고는 잠시 KBS로 가서 ‘욕망의 문’을 쓰고, 그 후로는 줄곧 MBC로 와서 1989년 ‘백범일지’와 ‘반민특위’를 방송한 이후에 1991년 드디어 화제작 ‘땅’을 내놓는다. 역시 대부분이 실명(實名)의 인물들을 모델로 했거나 시대성과 사회성이 있는 소재를 드라마로 만들었다. 혹자는 이 드라마 ‘땅’이 마치 무슨 권력에 정면도전하는 바람에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막을 내려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코 전적으로 확인된 바는 아니다. 부동산 투기와 권력의 커넥션, 비인간적인 탐욕을 통해 가진 자나 힘 있는 자들보다는 약자의 편에 섰던 드라마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김기팔의 드라마는 매번 그랬다. 마치 권력의 치부, 물질지상주의재벌의 치부를 고발하고 저항하는 듯한 분위기로 인해 끝까지 간 드라마가 많지 않았다. TV드라마를 한낱 오락만으로 볼 수 없다는 그의 작가정신에서 나온 것이지 어떤 특정 계층을 겨냥한 드라마들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 드라마 ‘제1공화국’은 1982년에 한국방송대상 극본 상을, 1984년과 1986년에는 ‘거부실록’과 ‘억새풀’로 백상예술대상 TV극본 상을, 1991년에는 ‘땅’으로 제1회 민주언론 상을, 1992년에는 역시 드라마 ‘땅’으로 한국방송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그가 작고한 이후에 주어진 상이다. 그만큼 김기팔의 드라마 ‘땅’은 그의 몇 안 되는 인기드라마 중에서 의미가 각별한 드라마라 할 수가 있다. 부동산 또는 땅에 대한 욕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천과 의식의 천민자본주의화를 적나라하게 그려나가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압력도 많았다. 김기팔의 드라마 치고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지 않은 작품이 드물지만, 설사 방송이 중단되는 경우가 생겨도 그는 절대로 굴하지 않고 시대의 증언과 고발에 눈을 감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기팔의 드라마가 방송될 때마다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통쾌하고 행복한 시절이 되었다. 그의 소망은 TV드라마의 한국화 작업이었다. 헐리웃 풍의 낡고 거짓에 가득 찬 기법에서 벗어나 진정한 한국적 드라마를 꿈꾸었고 시도했다. 영화는 판타지가 주 무기 이고 주요수법이지만 TV드라마는 결코 판타지여서 안 되며 어디까지나 현실이고 리얼리티이며 생활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며 처음부터 인간의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라는 근본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진실성이 없는 허구는 결코 드라마가 될 수 없고, 말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국적불명의 드라마는 정리되어야 하고, 일제식민 잔재와 퇴폐적인 양키즘의 찌꺼기를 우리 드라마에서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기 까지 했다.
TV드라마의 한국화 작업에 집요한 관심

1987년 3월 경 KBS-TV의 연속극 ‘욕망의 문’이 나가고 있을 무렵. 그는 스스로 이런 글을 썼다. 드라마작가로서의 피 끓는 그의 생각과 소망을 나름대로 이렇게 밝힌 셈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나는 TV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의 드라마, 특히 연속극을 보면서 곤혹스러운 경우를 자주 만난다.
첫째, 진실성들이 없다. 드라마는 결국 허구라 하지만 서툰 거짓말쟁이의 허풍 같아서야 쓰겠는가. 진실의 바탕이 없는 허구는 결코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둘째, 국적불명이다. 한국의 TV드라마작가들이 그리고 있는 ‘현실’이 분명 한국인의 생활인가? 우선 한국말을 쓰는 등장인물들이 일본인인지 미국인인지 구분이 안 된다. 심지어 옛 왕조를 그리는 사극까지도 저게 한국인의 생활일까 의문이 간다.
셋째, 퇴폐적인 것이라야 인기가 있다는 등식을 너무 신봉하는 것 같다. 정상적인 사랑은 드라마가 안 되는 것인지 삼각연애만 설정해놓고, 이리 붙나 저리 붙나 장난을 해서 국민의 정서를 해치고 있다.
넷째, 연출가들이 헐리웃 류(類)의 낡고 거짓에 찬 기법들을 마구 도입해 화면을 어지럽힌다. 영상이니 뭐니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차분하고 진실 된 영상미는 생각 안 해보는지.....
다섯째,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오만하다. 남의 집 안방에 들어오는 TV연기자들이 전혀 겸손하지 않고 시청자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대부분의 ‘인기 탤런트’들에게 시청자들은 식상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우리 드라마 종사자들이 고객(시청자)을 얕보고 날뛴다. 시청자들의 인기를 속임수로 끌려고 한다. 나의 이상은 TV드라마의 한국화 작업이다. 저 기만적인 일제식민지 잔재와 퇴폐적인 양키즘의 찌꺼기를 우리 드라마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로 본다. 한(恨)이 맺힌 민족이 공감하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드라마가 좀 많이 나왔으면.....이것이 작가 아닌 시청자로서의 내 소망이다.”
1987년 8월 10일자 모 신문의 ‘파한잡기’라는 칼럼에서 작가 김기팔은 이런 글도 남겼다.
“방송가에서는 물론이고 일부 신문지상에서도 ‘주연급 배우’라는 말을 흔히 쓴다.
A, B, C, D라는 자연인인 배우가 있을 때, A는 주연급 배우고 여타는 조연급 배우라는 식이다. 배우에도 계급이 있다는 뜻인지....물론 드라마의 배역에는 주역도 있고 조역도 있고 엑스트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배역상의 구분인데 인간(배우)에게 계급이 있는 듯한 용어를 쓰다니....그 발상이 한심하고 위험하다. 그래 주연급 배우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기를 “그러면 그대들은 주연급 면허증을 가졌느냐, 있으면 좀 보자”라고 따진 적이 있다.
배우라면 누구도 주연을 맡을 수 있고, 조연도 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은 평등하고 균등한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는데 굳이 ‘주연급 배우’라는 규정을 두는 것은 30년 가까운 우리네 특수한 정치문화의 영향인지....물론 배우들 각자에게 인기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양키즘적인 ‘스타’는 있을 수 있어도 계급적인 구분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작은 배역이나마 열심히 해내는 배우들을 격려한다는 배려는 전혀 안 하고, 강자(强者) 위주의 정책이 어찌 방송계에만 쓰여 지랴만....인간은 평등하다는 의식 하나 제대로 못 갖춘 한국에서, 아니 방송계에서 나는 오늘도 작가랍시고 글을 써먹고 산다.”
그는 이렇게 TV드라마의 한국화 작업에 대해 연기자에 까지 상업적 논리를 단호히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정도였다.
주연 조연은 있어도 ‘주연급 조연급 배우’는 없다

드라마에 관한 김기팔의 시각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다. 그래서 그런지 김기팔의 드라마에서는 이른바 조연급 배우들이 주인공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떠오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억새풀’의 허윤정, ‘야망의 25시’와 ‘거부실록-공주 갑부 김갑순’의 박규채, 사실상 마지막 TV드라마가 된 ‘땅’의 탤런트 오지명 등이 그들이다. 한 결 같이 별 주목받지 못하는 배우들을 데려다 그의 드라마에 출연시켰다. 그러면서 설사 완결하지 못하고 중간에 중단되는 드라마라 할지라도 불후의 인기드라마로 남겼다. 작가란 무엇인가? 드라마작가란 무엇인가? 오로지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성과 삶, 인생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파고드는데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김기팔은 몸으로, 가슴으로, 작품으로 말했다. 그의 40대 초반인 1980년 말에 18년이란 세월을 마치 전속작가처럼 몸담아 온 당시의 DBS 동아방송이 강제언론통폐합으로 KBS로 넘어가 사라지고 난 뒤, 그는 동아방송을 생각할 때마다 아련한 첫사랑의 연인을 떠올리듯 가슴이 한없이 두근거린다고 했었다. 그가 회고하는 동아방송은 상업방송이면서도 다른 민방과는 달리 ‘상업성=시청률(청취율)=저속함’의 등식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 작가 김기팔은 방송작가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계야화’만 해도 방송사 측에서 청취율을 고려해 재미있게 써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작가 역시 저속한 이야기로 청취자와 야합할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른바 멜로드라마는 쓰지 않았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 주로 남자들의 세계, 남자이야기만 썼다. 여성취향으로 변해가는 텔레비전드라마에서 남성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몇 안 되는 드라마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얼마나 행복한 시절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그에게 날이 갈수록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고통이었으리라. 한 5년 동안 절필을 하고 밤새 술만 퍼마셨다. 그렇잖아도 평소 어눌한 터에 성격 급한 사람들이 주로 그러듯 취기가 오르면 침을 튀기면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마치 한 마리의 짐승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때로 괴팍해 보이기도 하는 행동으로 씩씩거리며 종적을 감추기도 했었다.

그리운 악필(惡筆), 남자이야기와 남성드라마 시절이여!

그런 김기팔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악필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글씨를 못 써도 그렇게 못 쓸 수가 있단 말인가. 한글이 아니라 마치 무슨 상형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었고, 정작 원고를 쓴 자신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씨가 엉망이었다. 1990년대 초까지 방송계에는 육필로 원고를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옆으로 가로로 원고를 쓰기 보다는 아래로 세로로 내려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적잖은 방송작가들이 아예 원고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전용원고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1990년대 말까지는 육필(肉筆)로 쓰는 원고가 더러 방송가에 남아있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작가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거나 타이프나 워드프로세서로 원고를 쓰는 경우가 일반화 되지 않았다. 모두 자기 손으로 원고지에다 써내려갔다. 사실상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육필원고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육필로 원고를 써온 사람들은 원고지에 손으로 쓰지 않고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쩐지 혼이 없는 글을 쓰는 것 같다고도 했었다. 그만큼 육필원고의 의미를 각별히 생각하던 그 시절에 정말 김기팔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필이었다. 이집트나 인도의 글자처럼 생겼다고나 할까, 아니면 일종의 상형문자 같다고나 할까. 아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악필도 단 한사람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원고를 받아 프린트로 넘기기 위해 타이핑을 하는 각 방송사의 여성타이피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악필, 어떤 난필도 오자나 탈자 하나 없이 귀신같이 알아보고 쏜살같이 쳐서 넘겼다. 그런 김기팔의 글씨와 드라마를,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구보다 그리워 한 사람들도 바로 이 타이피스트들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왜 그 악필의 김기팔 드라마원고를 즐겁게 타이핑하고 잊지 못했을까. 김기팔의 드라마에는 항상 중독성이 있었다. 짙은 남성의 체취와 남자들의 이야기, 남성드라마를 쓰는 몇 안 되는 작가의 매력이 김기팔의 드라마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이야기의 경우 여장부만을 주인공으로

김기팔의 드라마는 주로 남성인물이 등장하고 남자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정계야화’나 ‘제1공화국’ ‘제2공화국과 같은 정치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와 아들‘ ’엄복동‘ ’개화백년‘ 등에도 당연히 남자 중심, 남자들의 세계가 나온다. 나중에 소설로도 나온 ’제이슨 리‘도 그랬고, ’야망의 25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남성들의 캐릭터고 남자중심의 세계다. 그러나 몇 편의 드라마는 달랐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억새풀‘은 웬만한 남성 못지않은 한국여성의 강인함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였고, ’거부실록‘ 시리즈로 쓴 드라마 가운데 ’평양갑부 백선행‘이나 ’제주부자 김만덕‘은 모두가 여성이었다. 또한 그들의 특징은 한 결 같이 통 큰 여장부들이었다는 점이다. 여자인 평양갑부 백선행이 모은 재산을 몽땅 털어 평양시내에 수없이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불편 없이 건너게 한다든지, 제주에서 번 돈으로 흉년에 육지에서 식량을 대량으로 사들여 굶어죽게 생긴 모든 제주도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는 제주부자 김만덕이라든지...좌우지간 남자들 뺨칠 정도로 통 큰 여성리더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만을 썼다. 그리고 그의 이런 시각은 걸핏하면 까무러치고 눈물로 지새는 종전 드라마의 연약한 한국여성의 이미지를 다소나마 바꿔놓는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들 모두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살았던 여성들에 관심을 갖고 발굴해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91년 12월 성탄 전날 작가 김기팔은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평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성격에 울화가 치밀어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들 말했다. 픽션, 즉 허구보다는 팩트를 더 강한 드라마로 여기고, 실화나 실존인물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드라마작가 김기팔은 그만큼 더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 않았을까. 김기팔 후로 다큐멘터리드라마나 팩트에 근거한 실존인물을 쓰는 드라마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다 비슷하게 팩트를 토대로 하는 드라마가 나와도 김기팔 만큼 다큐정신이나 팩트를 다루는 독특한 표현과 시각을 가진 드라마는 별로 없었다. 특히 정치드라마인 경우 쓰는 언어나 구성에 있어서 리얼리티가 넘치고 신뢰를 주는 드라마는 보기가 힘들었다. 전혀 리얼리티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순 엉터리로 지어낼 줄만 알았지, 드라마에 있어서 팩트를 중심으로 어떤 감동을 주어야 하는지를 아는 드라마작가는 거의 씨가 말랐다는 말들이 나올 정도로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판타지의 세상이 되어간다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 김기팔을 더욱 새삼 그리워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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