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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어머니, 엄마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어머니, 엄마
내용 우리 형제 6남매는 누구 한사람도 엄마 생전에 한번도 ‘ 어머니 ’ 라는 호칭을 써본 일 없이 다같이 엄마로 시작해서 엄마로 끝났고 지금도 역시 모두 다 여전히 ‘ 엄마 ’ 로 부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환갑도 못 드시고 예순살 여름에 돌아가시고 두 살 아래였던 엄마가 역시 환갑 전 해 예순 살 가을에 저 세상으로 이사를 가셨다.
아직 살아 계시다면 엄마가 금년 여든 일곱, 아버지 여든 아홉이시니 두 양반이 세상 버리고 떠나신지 어언 삼십년이 다 됐다.
고혈압이었던 엄마는 늘
‘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쓰러지면 그냥 그대로 가지 똥싸고 오줌싸고 수족 못쓰면서 그렇게는 안살껴 ’
하시더니 아버지 돌아가신 이년 후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쓰러져 평소 주장대로 병원으로 옮길 겨를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뒤 한번 안 돌아보고 세상을 버리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는 아버지가 자꾸 꿈에 보인다고 하시더니 어느 날엔가는
‘ 아무래두 늬 아부지가 데려갈라내벼.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늬 아부지가 얇은 이불을 갖구 나와 덮어주면서 목언저리를 꼭꼭 여며주는데 너머너머 생생햐. ’
하셨었다.
그렇다고 엄마와 아버지와 의좋은 부부였었냐 하면 하하. 그건 아니다.
아버지는 거의 평생 바람쟁이였었고 당연히 우리는 두 양반의 치열한 전쟁판에서 자랐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속에서 자라서도 누구 하나 크게 사고친 일 없이 비교적 반듯하게 자란 우리 육남매도 참 대단하다는 소리를 우스개로 할 정도였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대가 찬 여인이었다.
대가 찬 엄마가 아버지에게는 ‘ 독하고 극성맞은 여편네 ’ 였었고 말도 안되는 구실로 마치 그 앙갚음인 것처럼 끊임없이 바깥의 멍한 여자들에게 한눈을 파는 것으로 아버지는 엄마에게 거듭거듭 상처를 주었었다.
그런 아버지가 나 고등학교 일학년 때, 위암 말기 수술을 받고 엄마한테 하신 말씀이
‘ 내가 당신한테 너머 많은 잘못을 했어.죄받어서 죽을 병 든겨..미안햐...그런데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날껴. 앞으로 살어 있는 동안 두 번 다시 딴 여자를 보면 내가 사람이 아녀. 개아들여., ’
정확한 대사는 아닐지 몰라도 아마 비슷한 약속과 맹세를 하셨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그 약속과 맹세를 믿으셨었는지 위를 5분의 4를 잘라내고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를 혼신의 힘을 다해 보살폈었고 그 덕인지는 몰라도 길어야 6개월이라던 아버지는 그 후 20년 가까이 더 사셨었다. 그 시대에 그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었다.
그런데 건강을 되찾으면서 아버지는 병원에서의 약속과 맹세와 엄마의 헌신을 물거품을 만들고
어머니, 엄마
다시 바깥여자한테 한눈을 팔았고,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엄마에게는 완벽하게 ‘ 인간 ’ 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아버지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경멸하는 엄마의 복수는 내가 원고료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청주 아들 집을 나와 서울 나한테 와서 ‘ 남편 안보고 살기 ’ 였었다.
어쩌다 한번씩 아버지가 며칠 씩 다니러 오셔도 엄마는 철저하게 냉담했었고 그래서 뒷부분에는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가여웠었다.
그러나 그래도 부부는 부부였던가.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그래도 미움만 있었던 건 아닌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번 막내아우가 엄마한테 시건방을 떨어 내가 재떨이를 날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가
‘ 늬 아버지 죽구없으니까 날 깔봐서 그라는겨. ’
이런 말을 해서 나를 띠잉하게 만들었고, 내가 외국 여행에서 사갖고 온 손수건이며를 아버지 준다고 따로 챙겨 놓기도 해서 나를 먹머억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엄마마저 돌아가시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 아아 이제 진짜 고아가 됐구나 ’ 였었고 그게 너무나 허탈해서 많이 울었었다.
그리고 울다가 문득 그 울음이 내 엄마의 상처 많았던 인생에 대한 연민때문이 아니라 내가 고아가 됐다는 것에 대한 내 ‘ 상실감 ’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기를 그만 뒀었다.
돌아가시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거실에서 현관 복도로 나서는데
‘ 얘 에미야 ‘
너무나 확실하고 생생한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 으응. 엄마 왜애 ’
소리내어 대답하고 나서 잠시 찔찔 짰던 일이 생각난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엄마의 인생에 대해서도 차분하고 섬세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모르게 그저 나 먹고 살기 바빠 죽자사자 원고지 칸 메꿔 내보내고 원고료 받아 밥 먹고 살림 늘구며 겅중겅중 이었지 내 부모에 대해서 애틋한 마음 따위 거의 몰랐던 불효녀였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 내 아버지였던 한 남자 ’ 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었고 돌아가시고 나서야 ‘ 내 엄마였던 한 여인 ’ 의 인생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 가슴이 무너져 내려 몇 달 동안 참 많이 힘이 들었었다..
언젠가 엄마랑 같이 전주 쪽으로 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호텔이라는 곳이 생전 처음인 엄마는 호텔 방안에 깔린 카펫을 보고는 고무신을 벗어 들었었고 내가 .
‘ 엄마 그냥 신어도 되는겨. ’
했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떠오르면 여전히 코끝이 싸아하다.
엄마...내 엄마...
우리 엄마는 자식들한테 남편한테 그다지 살갑고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양심 발랐고 치사하지 않았고 비겁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어쩌다 내가 친구와의 일 때문에 마음 다쳐 풀풀거리는 것도
‘ 에에에이 ’
하면서 싫어하셨었다.
누구보다도 잘나고 반듯한 그릇이었으면서도 공부가 모자라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옛날 식 ' 여자의 일생 ‘ 을 살다 간 내 엄마.

내가 내 자식에 걸어놓은 신경 줄 한시도 놓지 못하며 이렇게 늙어가는데, 우리 엄마는 자식 육남매에 한 줄씩 여섯 줄을 걸어놓고 세상 뜨는 날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 밤잠을 설쳤을 거며 걱정과 애달픔으로 얼마나 마음이 고달팠을까.
별볼일없이 늙어가는 나와 내형제들은 이제 부모님이 꿈에나 보여야
‘ 왜일까 무슨 뜻일까 ’
잠깐 생각하고, 제삿날이나 돼와야
‘ 월요일이 아버지 제사야. 혹은 수요일이 엄마 제사야 ’
할 뿐, 부모님 인생 같은 거 부모님께 진 마음의 빚같은거 염두에도 없이 그냥 제각각 제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면서 어느새 모두 환갑나이를 향해 터벅터벅 가고 있다.
좋은 차타고 달리다가 문득, 비행기 타고 어딘가 날아가는 중에 문득
‘ 오래 살지...내가 별별 거 다 해줄 수 있는데... ’
그이들의 자식으로서 칠십 바라보는 내가 중얼거리는 고작의 회한이다. 이러니 자식이 다 무슨 소용인가.


엄마, 내 엄마
돌아가시기 전 십여년을 엄마는 아버지 ‘ 꼴보기 싫어 ’ 거의 나한테 와 계셨는데 원래부터 아무 취미도 없었고 그다지 낙천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아버지한테 얻은 상처와 좌절감 때문인지 삶에 대한 집착도 의욕도 별반 없는 분이셨다.
당신 남편에 대한 분노와 절망과 허탈감을 바닥으로 깔고, 육남매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시도 떨치지 못한 엄마는 거의 항시 늘 뭔가로 ‘ 속이 상한 상태 ’ 였다.

그나마 나하고 있을 때가 편했던 거 아닌가 싶은데 원고료는 그냥 써도 계약으로 특별고료를 받으면 몽땅 엄마한테 넘기면서
‘ 엄마 여기 엄마 좋아하는 돈 ’
했었다.
그렇다고 일원 한 장 엄마 마음대로 건드리지도 않으면서 엄마는 그걸 싫어하지 않았었다.

78년도에 잠깐 tbc로 바람을 피러 나갔다가 통합으로 kbs가 돼버렸던 방송국에서 다시 mbc로 옮기며 받았던 특별고료 9천만원 수표 한 장을 봉투째 엄마한테 넘겼었는데, 30년 전 9천만원이면 얼마나 큰돈이었겠나. 더구나 우리 엄마한테 말이다.
그걸 받아 들고 액수를 확인한 엄마가
‘ 얘 너무한 거 아녀? ’
그런 말로 놀라움을 표현했었다.
‘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엄마 딸 그보다 더 받어두 돼. ’
했더니
‘ 너머 그라지 말어 얘. 너무햐. ’
하셨었다.

엄마의 외출은 어쩌다 나랑 같이 차타고 교외 드라이브 나가는 일 말고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유진상가 시장 보는 게 전부였는데, 밤새워 일하는 입 짧고 까탈스러운 딸 곰국 끓이고 육개장 끓여 대면서 뭐든 먹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셨었다.



그리고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짜면 짜다 싱거우면 싱겁다 덜 끓었으면 덜 끓었다, 너무 끓였으면 너무 끓였다를 기어이 밥상에서 다 말해 버리는 나를
‘ 좌우간 귀신이여. ’
엄마는 웃으면서 다 받아 주었었다.

76년도였는지 77년도였는지 내가 평창동 지금 이 자리를 사놓고 집 지을 땅 구경 시켜준다고 엄마를 모시고 왔었는데, 무슨 돈이 있어 배짱 좋게 집을 짓는다는 건가 긴가민가 따라왔던 엄마는
‘ 무신 귀양살이 올껴? 여기다 무신 집을 짓는다는겨. ’
하셨었다.
그때는 집도 드문드문 길에는 다람쥐가 경주를 하고 장끼가 푸드득 날아 다녔었다.
어쨌거나 ‘ 긴가민가 믿기지 않는 그이 맏딸 김수현 ’ 은 78년도에 집을 짓기 시작했었고 그제서야 ‘ 집 짓는 일 ’ 이 실감이 난 엄마는 부지런히 국거리 사다 솥 걸어놓고 육개장 끓여 인부들 밥해 먹이고 참 해 먹이면서 집이 세워지는데 크게 일조를 하셨었다.
그 때 우리 집 지으면서 푸짐하게 대접 받았던 ‘ 집 짓는 사람들 ’ 이 낸 좋은 소문이 아직까지도 그들 세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도 내가 찾는 ‘ 딱 그 맛 ’ 은 바로 우리 엄마의 맛이다.

평생 가슴이 답답해 하루에도 몇차례씩 후우우우우 기인 한숨을 내쉬었던 엄마는 나랑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했었다.
눈치 봐서 시간과 의논해
‘ 엄마 우리 드라이브 갈까? ’
하면 내도록 무겁게 누워계시다가도
‘ 응 그랴. ’
가볍게 일어나 채비차리고 따라 나섰었고 한 바퀴 돌아 들어오면 기분이 훨씬 나아졌었다.
그렇게 일찍 떠나실 줄 미리 알았더라면 드라이브도 더 많이 여행도 더 많이 했을텐데 몇차롄가의 드라이브 몇차롄가의 국내 여행이 고작이었던 게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후회스러운 일 또 하나.
엄마 생전까지는 나는 아직 밤새워 작업하는 버릇을 못 고치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밤새워 일하고 얼굴 시꺼매져서 아침 늦게까지 자고 있는 걸 보여드렸던 일.
점심 먹을 시간까지 안 깨나서 내려와 보면 세상모르고 자는 딸을 깨우기는 깨워 먹여야겠는데 차마 못 깨워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고는 했다는 엄마 말을 엄마가 아닌 엄마 친구 어떤 아줌마한테 들었었다. 나는 딸 아이 얼굴에 돋은 뽀루지를 보고도 속이 상한데, 얼굴 까매져서 자고 있는 딸을 차마 못깨워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는 엄마의 그 안타깝고 애달팠던 마음이 이제야 손에 잡힐 듯 알겠다.
엄마 생전에 진작 낮 시간 작업으로 바꿀 걸.
불효 하고 싶어 불효가 아니라 철없고 무심한 불효도 큰 불효다.

후회 또 한 가지.
엄마는 낮에도 밤에도 티비를 틀어놓고 주무셨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때마다 잘려거든 티비 끄고 자라고 한 마디 씩 했었다.
그럼 엄마는
‘ 안잤어어 눈만 감구 있었단 말여어. ’
했었다.
‘ 코까지 골구 자던데 무슨 엄마 그짓말은 왜햐. ’
몇 번인가는 이런 면박도 주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몇 년전인가부터는 나도 티비 틀어놓고 자는 게 훨씬 편안하다. 뿐만 아니라 아직 60도 안된 동생 하나도 몇 년 전엔가
‘ 아우우 누나 나는 이상한 버릇 생겼어요. 티비를 틀어놔야 잠이 더 잘 와요오 .’
했었고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라고들 한다.
내가 이렇게 될줄 미리 알았더라면 엄마를 그렇게 구박 안하는 건데, 후회가 막심하다.

끝이 없는 후회.
나는 작업을 하는 중에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얼른 그 소리가 귀에 안 들오기가 일쑤인 사람이다.
얼마나 여러 번이었을까.
‘ 얘..저녁 먹어야지. ’
하는 엄마 말을 못듣고 그냥 디립다 원고지 칸 메꾸고 있다가 뒤늦게 무슨 소린가 들린 것 같아
‘ 응 뭐라구? ’
하며 돌아보면 엄마가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다가
‘ 저녁 먹어야지 ’
하셨었다.
그럴 때 가볍게
‘ 알았어요. ’
냉큼 일어난 일은 몇 번이나 될까.
거의 반은
‘ 아니 안 먹어. ’
그래버리고 다시 일속으로 빠져들었고 엄마는 한동안 자리를 못 뜨고 또 우두커니 바라보고 계셨었다.
돌아가신지 너무 오래돼 엄마 생각을 해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하더니 이제야 목구멍이 아파온다.
가여운 내 엄마..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평생 목 빠지게 해바라기만 하셨던 우리 엄마.

엄마는 내 아이가 나를 치대는 걸 몹시 싫어하셨었다.
‘ 아이구 엄마 고단햐. 그만 좀 치대라구. 이리 할머니한테 와 엄마 좀 내비둬. ’
그러고는 손녀딸한태 배를 베개로 내주고 누우시고는 했었다.
아아 손녀 딸이 아무리 귀하고 이뻤어도 당신 자식만은 못했던 우리 엄마.
나는 이제 엄마가 없다.
세상에서 제일 가여운 사람은 엄마 일찍 잃은 사람.
나이 칠십에 나는, 엄마 없는 내가 종종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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