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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히스토리(12) - 드라마작가의 낭만시대(1)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히스토리(12) - 드라마작가의 낭만시대(1)
내용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TV드라마작가들은 낭만을 먹고 살았다. 낭만을 썼고, 낭만을 꿈꾸었고, 낭만적으로 살았고, 낭만에 살고 낭만에 죽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드라마를 쓴다는 것은 곧 낭만적인 일이라고 믿었고, 드라마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窓)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며, 또한 꿈의 역할을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은 자기가 쓰는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낭만을 전하려 했고,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낭만을 잃지 않도록 애썼으며, 또 그렇게 쓰려고 온갖 몸부림을 쳤다고나 할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TV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때까지는 모든 드라마가 작가위주였고 TV드라마는 사실상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드라마에 있어서의 극본의 비중, 즉 작가의 창작력과 정신, 철학, 작품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가끔씩 한 드라마에 작가가 둘이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욕적인 일이었고, 자신이 쓴 극본에 토씨 하나 함부로 고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원고 늦기로 유명한 ‘H’모작가가 간신히 원고를 써서 넘기고 어디 지방으로 쉬러 간 뒤였다. 그런데 밤중에 연출자가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 비를 흠뻑 맞으며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깜짝 놀란 작가는 혹시 원고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웬일이냐고 물었다. “선생님, 여기 이 대사 좀 봐 주십시오.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자신이 쓴 원고를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별 것도 아니었다. “밥 먹었는가”와 “밥 먹었어?”의 차이였다. 작가는 “밥 먹었는가”라고 써놨는데 앞뒤 인물들의 문맥으로 봐서는 “밥 먹었어?”라고 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 때문에 거기까지 작가를 찾아왔다고 했다.


낭만의 시대는 작가중심의 드라마였고
토씨 하나도 손 못 대는 절대 권력으로


설사 작가가 잘못 쓴 거라고 해도 작가의 허락 없이는 토씨 하나도 못 고친다는 그 예의와 존중의 룰이 지켜지던 시절의 에피소드다. 본래 대사란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누가 제멋대로 손을 대고 함부로 고치려드느냐고 노발대발 행세하던 때의 이야기다. 연출은 오로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이라는 논리로 살던 시기의 낭만이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정명훈이든 카라얀이든 지휘자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나 바흐나 슈베르트가 쓴 곡을 자신이 거느린 악단을 지휘해 최상의 연주를 하는 것이지, 그 곡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시건방지게 고치려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물며 작가가 쓴 극본을 연출자가 자기 맘에 안 든다고 고치려 할 바에야 아예 자기가 쓰지 왜 남한테, 작가한테 써달라고 맡기느냐는 것이다. 혹시 잘못 쓴 극본이라면 그때 작가를 잘못 선정한 연출가의 안목이 문제로, 다음번에는 그런 실수를 안 하면 될 것이지 어디다 함부로 고치려들어? 뭐 이러던 시절이었다. 낭만도 꿈도 창의 구실도 거울의 역할도 쓰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고 어디까지나 작가의 몫이지 어디다 대고 극본이 좋다 나쁘다 하느냐고 길길이 뛰어도 지극히 타당하고 당연한 것처럼 통하던 시절이었다. 이쯤 되면 작가도 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를 쓰는 작가라는 일이 얼마나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작품성에 대해선 연출은 물론 방송사 간부나 고위층도 감히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 물론 그럴수록 작가의 책임은 더 무거웠다. 실제로 방송사 직원이 전부였던 연출자는 어쩌다 한 작품이 실패해도 다음 작품의 연출도 주어지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지만, 프리랜서인 작가는 한 작품이라도 실패하는 날엔 돈 한 푼 구경하기 힘들만큼 치명적인데 누가 그걸 엉터리로 쓰겠다고 하겠는가. 당시 작가가 누리던 낭만에는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모험과 악성투기성에 가까운 위험성이 항상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작가는 그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랄 수 있는 낭만을 먹고 살았다. 각박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덜했고,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가 지켜져 해볼 만한 작업이었다. 드라마가 기술이나 기교, 소프트가 아닌 하드의 공학(工學)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으로 인식되던 때라 행복했었다. 작품에 관한 한 작가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누가 감히 한 작품에 작가를 둘이나 셋이나 더 붙이겠다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공동 집필 또는 공동작업?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도중하차도 오로지 작가의 사정에 의해 결정되던 시절이었고, 더욱이 당사자의 허락 없는 작가의 교체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욕적인 처사로 받아들여졌다.


기술 중심의 드라마공학으로 전락하더니
‘복면작가’까지 등장한 비정상적 판도로


그러던 드라마계가 처음 출발했던 작가를 극본을 채 쓰기도 전에 바꿔버리거나, 심지어 한참 쓰고 있는 도중에 강제로 교체하는 일이 하루가 다르게 빈번해지고 있다. 왕년에 가졌던 작가의 자존심이나 낭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이른바 ‘복면작가’라는 말까지 나와 결국에는 저작권 시비까지 벌어지고 있다. 복면작가란 얼굴을 가렸다는 뜻으로 실제 극본을 쓰는 작가가 정확히 누군지를 밝히지도 못한 채 쓰는 작가를 뜻하는 모양이다. ‘복면시위’ ‘복면가왕’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작가가 복면을 쓰고 있다는 소리는 극히 최근에 나왔다. 가령 A드라마의 경우 원래 시작한 작가를 도중하차시키고는 극본을 누가 쓰는가 봤더니 연출자의 아내가 얼굴을 숨기고 쓰다가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 B드라마에서는 중간에 드라마가 방향을 잃은 채 허둥지둥 해서 알고 보니 그때까지 쓰던 작가를 그만두게 하고는 그 제작사 기획PD 몇 명이서 저희들 끼리 쑥덕거리며 극본이랍시고 쓰는 바람에 결국 드라마가 산으로 가버렸다는 말도 있다. 그것도 결국 저작권문제로 서로 다투는 바람에 탄로가 났다던가. 작가라고 할 수도 없는 자격미달 자들이 주물럭거리다가 작품을 버려놓고는 뒤늦게 저작권 운운하며 저희들끼리 서로 물고 뜯는 사태까지 벌였다니 어이가 없다. 작품이 무슨 ‘주물럭’ 요리인가. 그리하여 이제 드라마작가의 낭만의 시대는 가버렸는가. 작가가 존중받고 작품의 극본을 쓰는 작가에게 예의를 갖추는 시대는 영영 오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는 작가 자신들의 책임과 버려진 자존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일차적이고, 그 다음은 극본을 쓰는 작업 자체를 사람에 관해 이야기 하는 인문학이 아닌 순전히 기술 또는 기교 등 단순히 글자를 치는 노동력만으로 말하는 공학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낭만을 모르거나 낭만이 없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 그가 가진 가치관과 철학이란 이름의 작가정신을 메시지로 드라마를 쓰지 않는 작가는 작가일 수 없다. 그런 자는 나사못 정도를 깎는 한낱 기능공이거나 겨우 남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는 노동력 제공의 타이피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작가에게 돈을 주고 작품을 사려하지 않는다. 그가 가진 그만의 독창적인 테마를, 세상과 인생을 보는 그만의 시각에 대해, 다시 말해 그만의 낭만에 대해 존중과 예의를 갖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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