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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14)-임희재(3)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14)-임희재(3)
내용 TV드라마 ‘아씨’가 방송되는 시간에는 서울 시내가 텅 비었었다. 건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길거리에 오가는 행인은 물론 택시까지 올 스톱 되는 정도였으니까 그야말로 국민드라마로서의 ‘아씨’의 위력을 날마다 밤마다 느끼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때 내부적으로는 인기드라마 ‘아씨’의 행보에 이미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집필을 맡아온 작가 임희재가 회복할 수 없는 암에 걸린 것이다. 견딜 수 있는 데까지 비밀에 붙인 채 버텨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방송사로서는 후속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이야기도 남아있는 국민드라마 ‘아씨’를 그대로 중단할 수 있겠는가. 물론 드라마는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작가가 더 이상 마무리를 할 수 없는 형편이라 대필할 수 있는 작가 물색에 나섰다. 그때 등장한 작가가 방금 같은 방송사의 주간사극 ‘옥녀’의 집필을 끝낸 이철향이다. 이철향은 작가 임희재의 집으로 찾아가 병석에 누운 그를 만났다. 이미 기력을 다 상실한 그는 ‘아씨’의 개요와 남아있는 부분의 구상을 말하기 전에 우선 이철향의 소신대로 쓸 것을 당부했다. 자신이 생각한 당초의 구상이 혹 새 작가에게 부담이 될까 우려해서다.

숙환으로 대타(代打) 작가가 마무리
“내 아들을 더 악역으로 그려주시오”

물론 그렇더라도 어차피 ‘아씨’는 임희재의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지만. 다만 한 가지 그의 부탁은 ‘드라마 ‘아씨’에 악질로 나오는 ‘학재’라는 인물을 되도록 시청자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더 악역으로 그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극중 악역인물은 당시 공채 탤런트 출신인 작가 임희재의 외아들 ‘임 왕’이 맡고 있었다. 아들이 연기자로서 시청자들에게 인상 깊게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미리 써놓은 ‘아씨’의 마지막 회 원고를 넘겨주었다. 일약 국민드라마가 된 ‘아씨’의 마지막 회만은 자신의 원고로 끝내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아씨’의 작가 임희재가 써놓은 마지막 회 원고는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제작되어 일년 가까이 온 나라를 일시 평정한 드라마 ‘아씨’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한 세상 다하여 잠시 고향집에 들른 아씨가 옛사람들도 만나고, 아득히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부질없는 감회에 젖는 그런 장면의 해설이다.

“아씨는 공연히(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친정 부모님이 살아계실 리 만무하지만,
변모한 집 꼴 하며 홀로 되신 오라버니를 뵈오니 가슴 아파 마주 대할 수가 없었다.
온 세계가 변해가고 있으며 사람이 달나라에 까지 갔다 온 세상에, 어찌 친정만이 변치 않기를 바랬으랴마는, 지난 날 처녀시절에 부모님 앞에 글공부를 배우며 무남독녀 외딸로서 온갖 응석과 온갖 귀여움을 다 받던 그 시절!
그 집, 그 어른들은 어디 가고 아씨만이 살아서 칠십 객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 허망한 마음 이루 가눌 길 없어 괜히 친정에 왔다는 후회마저 드는 것이다.”

마지막 원고는 좀 더 나간다. 그리고 이 뒷부분이 말하자면 압권이다.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씨가 흰 머리에 가느다란 안경테의 돋보기까지 쓰고 밤하늘의 달빛을 바라본다.

“달은 교교하고 밤은 깊어 가는데 좀처럼 잠은 오지 않는다. 좀 전에 김수만이란 노신사를 만난 탓일까?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타다 남은 불씨라도 남아있단 말인가. 아씨가 수만이를 배신한 것은 그 시절의 아씨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씨는 당신의 한 평생을 불행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여자로서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앞서 가신 분들이 못내 그리워지는 것이다.
머지않아 당신도 그분들의 뒤를 따라 북망객이 되겠지만, 과연 천국이 있어 그분들과 만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이승을 하직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들이 아씨를 가리켜 무던하고 좋은 사람이라느니, 혹자는 천치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한 평생을 살 수는 없다느니, 또한 그를 통해서 한국적인 여인상을 재인식하며 인종(忍從)의 미덕을 높이 승화하기까지 하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다.
아씨는 곧 우리들의 어머니며 할머니며, 또한 그분들은 다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아온 것뿐이다. 1971년 1월 1일.”

마지막 사경을 헤매면서 육필로 쓴 프롤로그는 2백자 원고지로 모두 다섯 장이다. 누렇게 빛바랜 원고지에 이렇게 마치 인생을 관조하듯 차분한 글을 남기고, 그해 1971년 3월 30일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호적상 나이가 아닌 한국나이로 향년 50세. 경기도 파주 금촌에 있는 기독교공원 묘지에 그 후 동료작가들이 작은 묘비 하나를 세웠다. 거기다 쓰기를 ‘아씨의 작가 임희재의 묘’라고 새겼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그 묘비가 수 십 년의 비바람 속에 남아 묘비명에 새긴 글귀처럼 산새들이 찾아와 노래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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