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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15)-이은성(1)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15)-이은성(1)
내용 1980년대 초반 어느 초겨울 날의 새벽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날이 밝으려면 아직은 이른 듯, 뿌옇게 밝아오는 고속버스터미널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으스스한 분위기에 조금은 춥게 느껴질 만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웬 사나이가 두리번두리번 자기가 탈 버스의 행선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머리엔 모자를 눌러쓰고 손에는 간단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윽고 그 사나이가 터미널 벽에 놓인 벤치 근처에 왔을 때, 거기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나이가 눈에 띠었다. 그 역시 모자를 눌러쓰고 간단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사나이가 점점 벤치 가까이로 가자 먼저 와서 의자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중년의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도망자요?” “아니 이형! 이형도 도망자요?”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마주보며 씩 웃었다.
자기가 탈 차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사람은 눈이 좀 안 좋은 작가 임 충(林忠)이었고, 먼저 와서 의자에 앉아 “도망자요?” 하고 물은 사람은 유난히 덩치가 큰 편인 작가 이은성(李恩成)이었다. 두 사람 다 텔레비전에서 주로 역사극을 많이 쓰고 있던 사람들로, 작가 이은성은 소위 문예물이라 불리는 ‘TV문학관’과 같은 주목할 만한 TV드라마나 작품성이 강한 단막극을 누구보다 많이 써온 작가였다. 근데 그들이 이 신 새벽에 고속버스터미널에 웬일들로 홀연히 봇짐을 들고 나타났단 말인가. 보아하니 미리 약속한 것 같지는 않고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데.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도망자들이었다. 그 무렵 한 TV방송사에서
들여온 ‘도망자’라는 외화가 인기리에 방송되면서 유난히 ‘도망자’란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행하던 때였다. 물론 그 도망자하고는 다르지만 방송사에 써줘야 할 드라마 원고를 제때 못 써서 어디론가 도망을 치는 신세였다. 전화연락도 끊고 아무도 못 찾을 곳으로 가서 어쩌든지 작품을 써서 나타날 요량으로 이 새벽에 정처 없이 버스를 타고 각자 행선지를 정해 떠나려던 참이었다. 말하자면 둘 다 비슷한 처지로 새벽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는 각자 제 갈 길을 정해 다른 행선지로 떠났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방송은 시간싸움이지만 제 시간에 원고를 못 댈 때도 있다.

도망자! 그의 이름은 원고 늦은 드라마작가들.....

시간을 다투는 드라마원고를 쓰지 못해서 도망을 다니고, 펑크 내기 직전에야 간신히 원고를 들고 나타난 적이 비일비재했던 이들이라, 그들 사이에 ‘도망자’란 용어는 이미 일반화 되어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 마디로 “도망자요?” 했을 때, “이형도 도망자요?”라고 한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원고가 늦었을 때 어디론가 도망쳐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항상 초조와 긴장과 쫒기는 기분 속에 드라마를 썼다. 특히 작가 이은성은 평소 파지(破紙)를 많이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쓸 때마다 드라마를 한 번에 써내지 못하고 2백자 원고지 매 페이지마다 몇 번이고 고쳐 쓰고, 그때마다 잘 못 써진 원고지는 구겨버리는 습관으로 쓰레기통은 언제나 수북했다. 웬만하면 지우고 그 위에다 쓰면 될 텐데 그는 그걸 용납 못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이 쓴 원고지 위에 고쳐 쓴 흔적을 남기거나 잘못 된 글자가 있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여러 가지 색깔 있는 색연필로 아주 다채롭게 쓰기까지 해서 어떨 땐 원고지가 총천연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건 그냥 재미가 아니었다. 본인으로서는 꽤나 진지하게 그 작업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왜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렸는가는 차차 알아볼 일이다. 어쨌거나 원고를 쓰는 작업과정이 이러니 물리적으로도 탈고가 늦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원고가 빨리 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가 원고를 늦게 써서 사실상 펑크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그만큼 힘들게 썼을 뿐이다. 누구는 작가 이은성이 원고 쓰는 걸 지켜보고는 마치 탱크가 굴러가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 작지 않은 체구에 굵은 손가락으로 누구보다도 힘을 쏟아 드라마를 써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게 써낸 작품이 늘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찢고 또 찢어 파지(破紙)가 수북이 쌓여도
마치 검투사처럼 인간본질을 파고들어

마음을 흔들지 않으면 모두 가짜라고 했던가. 그는 항상 진실 또는 진짜만을 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편이었다. 덩치가 크다고 대범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새벽에 고속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도망을 가야 하는 작가 이은성을 어떻게 의지가 강하다거나 독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누구보다 좋은 작품을, 잘 써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려 가며 그야말로 검투사처럼 드라마 하나하나를 썼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때 기찻길 철로(鐵路)보선반에서 일했다. 스스로 자신의 학력을 ‘무학(無學)’이라고 쓸 정도로 제도권 교육에 대해 콤플렉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규학교를 나온 사람 못지않게 혼자 독학으로 이것저것, 특히 역사와 문학을 섭렵하는 공부를 그야말로 피나게 했다. 그러다가 1966년 당시 공보처가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에 ‘칼 마르크스의 제자들’로 떳떳하게 당선된다.
그리고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역시 시나리오 부문에서 ‘녹슨 선(線)’으로 당선된다.
철로보선반에서 일하면서 이별과 만남을 싣고 오가는 기차들을 수없이 보내거나 맞아야했고, 폭염과 혹한 속에 철길을 응급복구하면서 산다는 것의 쓴맛을 몸으로 체득하며 하나씩 둘씩 내놓은 결실이 바로 이런 작품들이었다. 작품이란 언제나 이를 악물고 피맺힌 절규처럼 써야한다고 믿고 있었다. 결코 헛소리는 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찼던 시절이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선 그것이 시나리오든 드라마든 절대로 가볍게 쓰지 않으리라는 작가로서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은성은 단막극이든 연속물이든 늘 끙끙대며 힘들게 썼다. 데뷔는 시나리오로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훨씬 많은 드라마적 요소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주로 영상과 액션과 사건에 의존하는 영화보다, 영상 못지않게 마음과 생각의 변화와 대사의 비중도 중요시 되는 TV드라마의 특징과 매력을 파고드는 일을 결코 등한히 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는 ‘KBS무대’를 위시해 TV단막극의 전성시대였다. 이때 이은성은 수많은 TV단막극들을 썼다. 그중에는 선우휘의 소설 ‘단독강화’와 같은 각색물도 있었지만 오리지널 단막극도 적지 않게 내놓았다. 이것이 곧 이은성의 드라마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가는 경험이며 내공이 되기도 했고,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주목받는 TV드라마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소중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많은 단막극 끝에 1972년 드디어 MBC-TV에서 연속극 ‘대원군’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실존인물의 삶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갖기 시작한다. 그 후로 줄곧 쓰게 된 KBS-TV의 ‘명인백선’ ‘세종대왕’ ‘강감찬’ ‘충의’ 등의 드라마가 단순한 역사극을 떠나 인물들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오로지 인간본질의 추구에 천착하려는 작가 이은성이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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