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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21)-이남섭(3)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21)-이남섭(3)
내용 전국을 들끓게 한 ‘여로’의 선풍
그 몸살과 후유증 몇 년간 이어져

1972년 4월부터 연말까지 약 9개월 동안 전국을 휩쓴 인기드라마 ‘여로’는 그야말로 열풍 그 자체였다. 방송의 전국네트워크화, 즉 KBS의 위력을 확인시켜준 계기이기도 했고, 텔레비전드라마가 국민들의 정서를 한꺼번에 흡입할 수 있는 장르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설사 그 내용이 최루성 신파 멜로로 흘렀다 해도 사람들이 이제는 TV드라마를 통해 세상을 내다보고, 인생을 생각하고, 꿈을 꾸고, 자신들을 들여다보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여로’ 신드롬은 한 편의 드라마로 끝나지 않고 그 후로 적어도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강타하기에 이른다. 가는 곳마다 ‘여로’ ‘여로’, 다방이름도 ‘여로’, 술집, 여관, 식당, 빵집, 심지어 목욕탕까지 간판을 ‘여로’로 갈아치우는 일이 벌어졌다. ‘여로’가 남긴 사회현상의 변화는 이뿐만 아니었다. 애들이 너도나도 ‘여로’의 남자주인공인 바보남편의 흉내를 내면서 사방에서 ‘떽시(색시)야 떽시야’ 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골치 덩어리였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곳은 영화관이나 극장과 같은 종래의 문화예술산업과 시설들이었다. 드라마 ‘여로’가 나가는 동안은 극장에 영화 보러 오는 손님들이 없을 뿐 아니라, 쇼 공연 등을 하는 곳에서는 ‘여로’의 주인공을 맡았던 탤런트(장욱제, 태현실 등)들을 모셔다 무대에 세우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될 지경이었다. 바야흐로 대중문화계의 판도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영화나 공연의 시대는 가고 텔레비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작가이며 연출가인 이남섭이 드라마 ‘여로’를 기획한 것은 그보다 앞서 선풍을 일으킨 또 하나의 국민드라마 ‘아씨’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중문화계의 판도변화를 가져온 ‘여로’”

대충 그 정도의 인기만 끌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한 드라마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 시청자들의 반응은 ‘아씨’를 훨씬 능가하는 폭발적인 것이었다. 두 가지 드라마가 모두 여성을, 지난 시절의 한국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같으나, ‘아씨’는 순종과 희생의 미덕을 핵심으로 다뤘고 ‘여로’는 꿋꿋한 생활력과 개척정신과 여성의 리더십을 덕목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자의 일생, 여인의 한(恨), 전통적인 한국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로는 사실상 정점을 찍는 하이라이트였다. 물론 그 뒤에도 한동안 이와 같은 패턴의 눈물 짜는 여성주인공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등장하고, 그때마다 평균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보증수표처럼 되긴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여로’의 인기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주요배역을 맡았던 배우들, 장욱제와 태현실과 박주아와 김무영 등은 밖에 나가서 마음 놓고 길을 걸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팬들의 극성에 시달렸고, 이른바 TV드라마계의 스타주의가 ‘여로’ 이후에 생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특히 악역을 맡았던 연기자는 한동안 무사히 나다니기가 어려웠다. 최초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논란도 있었지만,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장애인 남편을 두고 집을 나간 며느리가 ‘여로’를 보고 다시 돌아왔다며 고마움을 표시하려 방송사까지 찾아온 노부모도 있었다.
“연기자 아내를 한 달 후에 따라가다”

그런가 하면 술집 같은 데서는 ‘여로’가 방송되는 시간이면 여자종업원들이 모두 드라마를 보기 위해 자리를 뜨는 바람에 손님들과 시비가 일어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었다. 극장이고 어디고 대중문화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연출 겸 작가, 작가 겸 연출의 실험은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었던가. 이남섭은 이 불후의 인기드라마 ‘여로’ 이후 몇 편의 드라마를 더 쓰고 연출했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드라마에 있어 작가는 음악의 곡을 만드는 작곡가라면 연출은 그 곡을 가지고 자신의 악단을 지휘해 멋진 연주를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엄연히 역할과 기능이 다르고, 그 기능과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로소 더 좋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서 작곡가의 곡을 자기가 쓰려 들거나 곡을 함부로 고치려드는 연출자는 과욕이고 영역침범이다. 아마도 그런 한계 때문에 연출과 작가의 양립이라는 이남섭의 실험은 더 이상 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이 없어진 그는 탤런트인 아내 김난영의 차를 모는 운전사로 얼마동안 소일한다. 아내가 드라마에 출연할 때면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방송사 작가실에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거나 졸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을 호령하며 드라마를 만들고, 직접 극본까지 써서 전무후무한 국민드라마를 만들었던 사람이 연기자 아내나 태우고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편안한 자세였다고나 할까. 자기가 그나마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뱀탕 때문인 것 같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뱀탕 먹을 것을 권유하던 이남섭! 그때까지 아내와 번 돈을 충남 아산의 사과농장에 투자해 노후에 거기서 살기로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내 김난영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슬픔이며 생의 의욕을 꺾어버리는 운명이었던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후 그 역시 숨을 거뒀다. 1987년 향년 66세. 부부간에는 암도 전염이 되는가. 사람들은 모두 그때 그런 말들을 했었다. 두 사람은 노후에 가서 살기로 한 바로 그 사과농장에 나란히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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