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25)-김희창(2)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25)-김희창(2)
내용 “드라마의 품질과 인기는 양립할 수 없는가”
의문부호 남긴 작가 김희창의 드라마들


작가 김희창이 방송에 관여하게 된 시기는 1933년이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일제가 경성(서울)에서 JODK라는 호출부호를 써서 일본말 방송을 처음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서 제2방송이란 채널로 한국말 방송을 함께 하게 된다. 바로 그 무렵에 김희창은 연출가 박 진, 여배우 복혜숙과 더불어 ‘라디오 플레이 미팅’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노차부(老車夫)’라는 드라마를 써서 방송하면서부터 그의 드라마 인생은 시작되었다. ‘노차부’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현대기계문명의 상징인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사람이나 말(馬)이 끌던 시대에서 차츰 밀려나는 늙은 차부의 비애와 문명비판을 드라마로 써서 주목을 받았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라디오드라마인 셈이다. 그런 김희창은 1908년 서울 교남동에서 태어난 순 서울토박이였다. 태어난 연도로 보나 최초의 방송드라마인 ‘노차부’로 보나 그는 드라마작가의 원조이며 방송드라마의 길을 잡은 아주 오래된 미래였다. 유년시절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지금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와서는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무대장치든 뭐든 가리지 않고 지방공연까지 따라다니며 열심히 일하면서 한편으론 그의 꿈인 극작에 열중한다. 그 결과 내놓은 것이 당시로서는 생소하고 미개척분야라고 할 수 있는 라디오드라마였다. 육이오전쟁 시기인 1950년대 초에는 유엔군사령부 전속작가로 일본 동경에서 심리전방송에 전력을 다했고, 드디어 귀국을 해서는 1958년경부터 본격적인 방송드라마를 내놓기 시작해서 그 후 대략 30년간에 걸쳐 숱한 명작인기 라디오드라마와 명품 텔레비전드라마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완벽주의, 방송드라마의 초석을 다진 작가

김희창의 드라마는 라디오에서는 물론이고 TV초창기시절에도 방영될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 ‘열 두 냥짜리 인생’과 ‘행복의 탄생(또순이)과, 또 ‘로맨스 빠빠’ 등 라디오드라마들 여러 편은 영화로 제작되었고, 그의 TV극 가운데 격조 높고 인기가 많았던 대표적인 텔레비전드라마로는 ‘탑(塔)’ ‘만고강산’ 등이 있다. 그는 방송드라마를 언어예술의 경지에까지 그 수준을 끌어올렸다. 소재 또한 다양하면서 결코 주제를 놓지 않고 뚜렷한 메시지를 강력하게 부각시켰다. 작품 하나하나를 마치 탑을 쌓아올리듯 한 군데 버릴 데 없이 완벽하게 쓰는 결벽증이 있었고, 다듬고 담금질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써야 직성이 풀리는 꽤나 까다로운 작가였다. 그렇게 쓰니까 누가 감히 토씨 하나도 고치면 용납하지 않는 작가였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지 않으면 아예 내놓지 않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무렵 서울 성북동에서 살 때는, 이웃의 작가 한운사 집이 바라다 보이는 집필실에서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서로 잠을 자지 않고 드라마 쓰기 경쟁심을 불태웠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결코 흥행위주의 상업주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중성을 저버리지도 않았다. 특히 단막극 분야에 있어서 그의 작품성은 라디오는 물론 텔레비전 시대에서도 방송드라마의 길잡이 역할과 함께 질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깊은 산속에서는’ ‘코리안 라이프’ ‘후기인상파의 밤’ ‘홰나무’ 등은 단막극이지만 방송드라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양한 소재를 마치 성직자처럼 쓰다

방송이, 특히 텔레비전방송이 날이 갈수록 상업성이 강해지고 인기만을 드라마의 척도로 삼는 시대가 되자 그는 스스로 붓을 꺾고 방송계를 떠난다. 드라마의 인기와 작품성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일군의 방송드라마작가들은 한때 김희창을 자신들의 ‘멘토’로 삼기도 했다. 소재의 다양성이나 언어를 다루는 솜씨, 그리고 드라마의 리얼리티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작가정신 내지는 작가의식에 있어서 일종의 전범(典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방송작가들을 데리고 외부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참가작가 중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자 당장 그 행사를 취소하고 돌아와 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길로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협회장직을 그만두었고, 다시는 그들을 쳐다보거나 작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작가로서 작품만 깐깐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성직자처럼 일종의 청교도적인 성품을 가졌던 것이다. 성직자처럼 작품을 썼고 작가라는 직분을 성직자처럼 생각했다. 드라마 소재의 다양성 개발에도 남달랐다. 밑바닥 서민의 생활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역사를 드라마로 쓰기도 했으며, 교수가 나오기도 하고, 불량배, 과부, 홀아비, 명동의 멋쟁이, 시장 통의 장사꾼, 아버지와 아들, 저 휴전선에서 적과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이야기도 썼다. 장인(匠人)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시대성 또는 사회성을 띠는 드라마도 있었다. 무속을 다루거나 이른바 민속신앙과 전통문화도 기꺼이 드라마의 소재로 삼았다. 이 모두가 한 결 같이 정제된 드라마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때마다 김희창의 드라마에 시청자나 청취자는 전율했다.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불필요한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936년에 이미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되기도 했지만 방송에서는 희곡과는 전혀 다른 순수방송드라마만을 쓰는데 충실했기에 한국방송드라마의 기틀을 잡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TV방송의 상업주의에는 그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일찍 방송계를 떠난 뒤 1998년 향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