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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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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 인문학(46)-김창숙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46)-김창숙
내용 청초하고 선량해 보이는 이미지의 ‘김창숙’
한때는 TBC-TV드라마의 간판스타였다

1982년 여의도 KBS별관에서는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났다. 아침드라마 ‘행복의 계단’에 탤런트 김창숙이 주인공으로 내정됐는데, 그녀의 가족들(시댁 쪽)이 달려와 절대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없다고 몸으로 막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일로 아침부터 방송사는 들썩거렸다. 연기자들 가운데 처음부터 부모가 아예 활동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결혼 후 시댁에서 몰려와 연예계 복귀를 반대하며 소란을 피운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맘에 드는 연기자를 캐스팅했다고 싱글벙글 즐거워했던 연출자 곽영범 PD는 그 일로 뜻하지 않은 소동까지 일어났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1982년이면 1980년 신군부정권에 의해 방송사가 강제 통폐합되고 민방 TBC의 PD들 또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모두 KBS로 몰려 든 상황. 이 뜻밖의 작은 소동이 일어난 KBS 별관도 알고 보면 과거 TBC텔레비전 건물을 강제로 뺏은 곳이다. 거기서는 졸지에 각 방송사에서 합류한 PD들이 각자 생존하기 위해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속에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모처럼 한 건 올렸다고 생각하고 잘 해보려던 곽영범 PD는 무척 당황했다. 부랴부랴 김창숙의 집까지 찾아가 이미 출연한다는 것이 언론에 보도까지 됐으니 허락해달라고 사정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길고 끈질긴 설득작전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미 1978년에 당시 청년사업가와 결혼해 사실상 은퇴하다시피하고 착실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는 배우 김창숙을 다시 끌어내려고 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대략 1971년부터 결혼 전까지 TBC-TV의 간판스타로 너무나 화려한 연기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전 한창 전성기 때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인기를 누리던 탤런트였다.

깨끗하고 연약하게만 느껴지던 연기자
드라마는 물론 한국영화계까지 누볐다

뚜렷한 개성보다는 청순가련형에 한없이 청초하고 선량해 보이는 그녀의 이미지가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으리라 믿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냥 연약하게만 보이던 김창숙의 인상이 적어도 안방극장에서는 좋게 받아들여지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전남 완도 출신, 경희대 무용과 중퇴의 김창숙은 일찍이 1968년 TBC-TV의 탤런트 5기생(어떤 자료에는 1965년 TBC탤런트 공채4기생)으로 방송에 발을 디뎠다. 그 후로 3년 동안은 단역이나 조연을 맡아 연기수련 과정을 착실히 거친다. 물론 그 당시 TBC 내에는 안은숙, 김희준과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연기자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주연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68년 8월에 데뷔작으로 꼽히는 시대극 ‘김옥균’과, 곧이어 ‘팔판동 새아씨’에 출연하면서 그녀의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김창숙이라는 신인탤런트가 안방극장에서 일약 유명해지는 계기가 생긴다. ‘마부’라는 드라마가 그것이다. 자동차시대에 밀려나 잘 나가던 시절은 옛말이 되고 점점 찌그러져 가고 있으면서도, 그 애지중지하는 말(馬) 한 마리를 생활의 밑천으로 버리지 못하는 가장의 이야기와 그 가족의 애환을 그린 홈드라마였다. 문제는 김창숙이 여기서 말 못하는 착한 벙어리 처녀로 출연한다는 점이다. 신인을 주인공으로 발탁하는 경우 대체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대사다. 주연을 맡았다는 흥분감, 잘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부담과 초조함으로 자칫 흔들리면 무엇보다 대사가 막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대사를 암만 외웠어도 더듬거리며 잘못한다는 것. 근데 그 대사 없는 벙어리 역할이니까 유리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손짓발짓으로 연기를 하는 것을 훗날처럼 자막을 깔지 않고, 시청자 편의를 위해 자막처리 대신 따로 김창숙의 목소리로 대사를 입혔으니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짓발짓에 대사연습까지, 김창숙은 혹독한 연습과정을 거쳐 드디어 첫 주인공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덕분에 드라마 ‘마부’는 당시 안방극장에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며 인기가 치솟았다.

다시 돌아와 재기에 성공한 탤런트
나이에 맞는 아무 역할이나 척척

이 한편의 드라마로 김창숙은 순식간에 인기탤런트 반열에 올랐고, 특히 이 무렵 ‘아씨’의 김희준이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나면서 김창숙은 명실상부 TBC-TV의 간판스타로 급부상한다. 이후 김창숙은 드라마 ‘연화’ ‘옥피리’ ‘망향’ 등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스타가 사라진 한국영화계로 그 활동무대를 넓힌다. 바로 이 점이 김창숙 이전의 선배탤런트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 전까지는 영화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 TV드라마로 오는 연기자들이 많았지만, 김창숙을 기점으로 TV에서 활동하다 거꾸로 스크린으로 가거나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하는 시대로 대세가 굳어졌다. 김창숙이 TV드라마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어갈 무렵 그때까지 스타시스템으로 운영해오던 영화계에서 문 희, 남정임, 윤정희의 트로이카 시대가 은퇴로 인해 무너지자 자연히 TV의 인기스타들에게 눈독을 들일 수밖에. 덕분에 김창숙은 그때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출연료를 받고 영화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978년 그녀는 결혼과 함께 TV드라마는 물론 영화계를 떠난다. 그랬던 김창숙을 1982년에 다시 텔레비전드라마로 끌어들이려다가 일단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김창숙은 결혼 전까지 무려 30여 편의 텔레비전연속극에 출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결혼 전 마지막 출연한 작품으로는 주간시추에이션드라마 ‘부부’로, 탤런트 김세윤과 공연하다가 도중하차하고 조용히 TV드라마를 떠났다. 김창숙이 은퇴하자 TBC-TV는 일시적으로 간판급 여자주인공 급이 없는 일종의 스타공백기를 맞는다. 그리고는 또 세월이 흐른 후, 김창숙은 다시 TV로 복귀해 왕성한 제2의 연기활동을 벌인다. 아침, 저녁의 일일연속극으로부터 시작해 주말연속극 등의 주간드라마에서, 예전의 그 청초함과 연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나이에 맞는 각종 역할을 사양하지 않고 연기자로서의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KBS-1TV의 주간시추에이션 농촌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에서는,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시골시장패션의 옷을 입은 수더분한 시골아낙 역을 맡아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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