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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47)-강부자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47)-강부자
내용 ‘강경 통치마’로 통한 연기자 ‘강부자’
얼굴이 아닌 신들린 연기로 승부하다

1962년 2월, 아직도 추위가 덜 가신 당시 남산의 KBS공개홀에서는 신인탤런트 선발을 위한 면접시험이 열리고 있었다. KBS 제1기 탤런트 모집에 이어 국내 텔레비전방송사상 두 번째로 열린 그날의 탤런트 공모에는 무려 2천명에 가까운 지망자가 몰려 1차 서류심사로 가려내고, 그 나머지 인원들로 면접을 치르는데도 여전히 숫자가 많아 한꺼번에 5명씩 묶어서 선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뜻 봐서도 눈길을 끌만한 외모거나 뚜렷한 개성을 지닌 지원자만이 겨우 몇 마디 질문을 받을 뿐, 그저 평범한 얼굴들은 인사만 하고 내려오기에도 바빴다. 한참 면접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번에도 다섯 명의 여성 지망생이 한 묶음으로 심사위원들 앞에 섰다. 그러고는 수험번호 몇 번 아무개라는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알았으니 내려가라”고 했다. 보아하니 5명 모두 평범한 얼굴들이라 물어보나 마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대개 두 말 없이 물려가게 마련인데 근데 이번엔 달랐다. 5명 가운데 한 여성이 느닷없이 당돌하게도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거참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니 마치 1940년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여배우처럼 한복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를 입고 있는 처녀였다. 한 마디로 촌티가 줄줄 흐르는 옷차림에 딱히 외모도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신통찮았다. 그런 지망생이 심사위원들이 내려가라고 하는데도 이럴 수가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며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섰었다. 통치마를 입은 그 처녀 지망생은 “이래 뵈도 성우생활까지 했는데 어떻게 특기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가라고 하느냐”며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현장을 찾아 익힌 신들린 연기
TV드라마연기는 재능만이 아니다

그때만 해도 라디오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몰고 있던 시절이라 웬만한 성우는 심사위원들이 다 아는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라 어디서 성우생활을 했느냐고 물었다. “대전방송에서 성우 일을 했는데요”가 그녀의 대답이었다. 이미 서울의 본사 중심으로 라디오드라마가 제작되어온 마당에 고작 지방방송에서 성우를 했다는 것도 경력이라고 우기고 나오다니! 조금은 엉뚱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지방에서 성우를 했다니 목소리 연기라도 한번 해보라고 시켰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목소리 연기를 들어보니 뜻밖에 개성도 있고 연기력도 있어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잠시 면접을 중단하고 이 ‘통치마 처녀’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즉석회의를 열었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합격이었다. 비록 주연감은 아니지만 연기자로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말 한 마디도 시켜보지 않고 그냥 “나가라”는 심사위원들의 처사에 오로지 뚝심으로 버티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그 후 그 처녀는 충남 강경에서 왔다고 ‘강경 통치마’란 별명으로 불렀고, 그녀가 훗날 한국 TV드라마의 중심연기자가 되어 이것저것 모든 드라마를 누빈 탤런트 강부자(姜富)子)이다. 하지만 이렇게 호기만만하게 출발한 연기자 강부자도 그녀의 첫 출연작품에서는 주위사람들로 하여금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3개월 동안의 연기교육을 받자마자 드라마에 출연하라는 배역 통지를 받았다. 고작 단막극 형태의 홈드라마에서 일개 단역에 불과한 여자점쟁이였다. 연출자가 몇 번이고 연습을 시켜봤는데 전혀 고쳐지지 않고 도무지 점쟁이 냄새가 나지 않는 영락없는 햇병아리연기자라 “겨우 그따위 역할도 못하면서 무슨 탤런트가 되겠느냐. 당장 그만두라!”고 호통을 쳤다. 근데 문제는 다음 날, 연습시간이 지났는데도 강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난 그 다음날도 역시 강부자는 행방불명이었다.

평범한 생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연기로 승부하다

사람을 보내 알아봤더니 집에서는 방송국에 나간다고 아침 일찍 나갔다는 말만 할 뿐, 드디어 사흘째 되는 날에는 하는 수 없이 배역을 바꿔서 드라마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제야 중년여인으로 분장까지 한 강부자가 스튜디오 안에 나타난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방송시간은 다 됐고 급히 어떻게 할 수도 없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대로 드라마에 출연시켰다. 과연 실수 없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가운데 나온 강부자의 점쟁이 연기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불과 며칠 전 연습 때와는 너무나 다르게 리얼리티가 살아 있었다. 뜻밖이었다. 이 한방으로 강경 통치마 강부자는 일약 연기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녀는 점쟁이 연기를 해내기 위해 종로 탑골공원 옆에 있는 무당집까지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가 하루 종일 지키며 피나는 현장실습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강부자는 남모르는 피나는 노력으로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자가 되었다. 그렇게 TV드라마 초창기에는 신들린 사람들이 많았다. 연기든 연출이든 작가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텔레비전드라마의 연기자는 영화나 연극배우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만 해도 후시녹음을 하던 영화와 달리 TV드라마에서는 연기자가 직접 동시 대사를 해야 했고, 그것은 곧 탁월한 대사능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사인 방송언어, 즉 스스로 말의 맛을 낼 줄 아는 연기자라야 한다. 다소 액션이 크고 과장된 연기를 해야 하는 연극무대의 배우하고도 근본적으로 연기의 바탕이 달라야 했다. 마치 우리 이웃에서 날마다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기 하지 않는 것 같은 연기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를 위해 처음부터 강부자는 실제 점쟁이를 찾아가 꼬박 이틀을 함께 보내며 몸에 익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텔레비전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 평생 그녀는 이웃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처럼 연기 아닌 진짜 연기를 펼쳐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들은 거의 모두가 시청자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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