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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작가 김수현의 드라마 세계(2) - 문학의 오늘 2021년 가을 호 특집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작가 김수현의 드라마 세계(2) - 문학의 오늘 2021년 가을 호 특집
내용 선명한 주제로 ‘마음’의 움직임을 그려가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긍정의 마인드다. 어둡고 음습하지 않고 대체로 밝고 따뜻하다. 작가 자신이 인간을, 인생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이리라. 어떤 경우에도 절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찰 즉 인간 들여다보기에서 얻어진 결론이기도 할 테고,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인간들을,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필사적으로 들여다 본 결과로 나타난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연구내공이 깊고 풍부하다는 것을 드라마의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세상과 인간을 끊임없이 들여다 본 데서 얻은 드라마의 밑천들이 그의 창고에 이미 가득 차 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서의 진정성과 날카로움과 번득이는 재능이 드라마마다에서 빛난다. 급기야 모든 드라마의 주제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하고 작품의 개요 또한 쉽고 명쾌하게 정리해버린다. 집필의도를 나타내는 한 줄짜리의 이른바 ‘로그라인’에 있어서도 언제나 그 내용과 방향성이 뚜렷하다. 1970년대 이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일일연속극들에서부터 1980년대 컬러TV시대 이후의 주간 극에다 주로 2000년대를 전후해 감동을 안겨준 명품단막극까지, 김수현의 드라마는 작품마다 그 주제가 명확하고 작품개요가 간단명료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곧 작가가 작품마다 어느 쪽에 집중해서 일목요연하게 드라마를 몰아가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키워드가 되는 셈이다. 드라마마다 집요하고 치밀하고 또 치밀하게 쓴다는 자세를 나타내는 일종의 신호나 습관 같은 것이다.
예컨대 1970년대의 일일극 ‘신부일기’는 서울로 시집 온 똘똘한 시골색시가 어떻게 살아갈까 이었고, ‘강남가족’은 선량하고 정직한 공무원가장의 가정이 살아가는 이야기였으며, ‘여고동창생’은 친했던 여고동창생들의 세월과 변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여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시골에서 서울로 시집 온 새댁에 맞추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히 살아가는 향기로운 인생을 위해 늙은 세무공무원을 가장으로 등장시켰다. 일일극 ‘봄이 오는 소리’도 이하동문, 마찬가지였다. 뚜렷한 주제의식과 간단명료한 작품개요는 1980년대의 주간연속극에서도 그랬고,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단막극이나 멜로드라마에서도 그랬다. 김수현드라마의 사랑시리즈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진실’에서는 두 자매의 엇갈린 운명과 신분 바꿔치기였고, ‘사랑과 야먕’에서는 각기 다른 형제이야기이었으며, ‘산다는 것은’에서는 한 처녀가장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배반의 장미’에서는 십 여 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남편을 돌보는 젊은 아내의 마음의 행로를 그렸고, ‘작별’에서는 치명적인 질환으로 죽음을 앞둔 중년의사를 통해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와 아픔을 보여주는 경우였다. ‘은사시나무’는 이 세상에 외롭고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디로 가나’는 시아버지와의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사랑 찾기다. 한 결 같이 주제가 선명하고 스토리텔링과 작품개요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다만 깊이 있게 다룰 뿐이다. ‘부모님전 상서’는 조금만 옛날로 돌아가자 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전, 불과 얼마 전까지의 사는 방식과 정서가 훨씬 행복하고 인간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 드라마에선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등장인물 모두의 시간이나 생각이 조금은 예전 같은 고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명제의 산뜻함과 발상의 전환이 김수현드라마 전체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요란한 액션이나 행동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 흘러가느냐를 그리는데 치중하고 있다. 결코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 구조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도 한다.

‘철저한 리얼리티'로 무장한 드라마

이른 아침, 서울의 어느 주택가 양옥집. 그 집의 가장(배우 김세윤)은 잠옷 차림으로 조심조심,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와 대문간에 가서 조간신문을 집어온다. 그리고는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놓고는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아내를 깨운다. 한편 또 다른 주택가 한옥 집에서는 역시 그 집의 가장(배우 이순재)이 마당에 서서 다짜고짜 안에다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각 방마다 온 식구들이 화들짝 놀라 깬다. 그리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군대조직의 졸병처럼 우왕좌왕 쩔쩔 맨다. 한 눈에 봐도 한쪽 집안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문화인데 반해, 다른 쪽 집안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며 거의 독재에 가까운 가풍이다.
1990년 11월 23일부터 1992년 5월 31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저녁에 방송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시작부분, 즉 도입부의 상황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집안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심상찮다. 이 상반된 문화의 두 집안의 자녀들이 서로 사귀귀도 하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 또는 낯설어하며 앞으로 사돈도 되고, 사사건건 부딪쳐가며 가치관 내지는 문화적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어간다. 두 집안의 아내들은 알고 보면 여학교 때 동기동창 관계다.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유쾌한 대조를 그냥 내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웠다. 평균 시청률 70%를 웃도는 의도하지 않은 ‘블록버스터’로 김수현드라마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시청률 70% 이상이면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매번 이 드라마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현실과 생활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장장 일 년하고도 6개월이 넘도록 경쾌하게 펼쳐졌다.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각기 다른 문화를 서로 존중하며 인정하는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까지 김수현의 주말 또는 일일연속극에서 가끔 보여주었던 코믹터치가 그 절정을 이루면서,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주말 저녁 8시 시간대는 남의 집에 전화하는 것조차 실례라고 할 정도로 온 국민이 이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른바 ‘김수현신드롬’의 패닉현상 종결 판 양상을 다시 불러일으켜주었다.
1980년대 컬러TV시대 이후 김수현드라마는 종전 흑백시대의 일일연속극에서 주말연속극으로 종목을 바꾸었는데, 오히려 매일 나가던 일일극 못지않게 더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시청자들이 김수현드라마에 질질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되었고, 이와 같은 현상은 이후 1990년대와 2010년대까지 이어졌다.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배반의 장미’ ‘청춘의 덫’(리메이크) ‘내남자의 여자’ 등의 멜로드라마까지, 주간연속극 시대를 완전 평정한 또 한 번의 김수현드라마 전성시대였다. ‘사랑이 뭐길래’는 최초의 한류드라마다. 한국드라마로는 처음으로 외국(중국)에 수출되어 중국대륙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김수현드라마는 재미있다. 그 재미의 비법은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리얼리티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본질을 추구하는 김수현드라마는 리얼리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허구는 가라’고 외치고 있다. 드라마란 것이 기본적으로 지어내는 픽션 임에도 김수현의 드라마는 순 엉터리로 지어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철저히 거부한다. 리얼리티가 없는 드라마는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리얼리티가 곧 TV드라마의 특성이고 숙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드라마란 영상 이전에 언어문학이고 기본적으로 대사극(臺詞劇)이다. 그래서 대사를 살린다. 단순히 말이 많다거나 말의 성찬이라서 그의 대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항상 적재적소에 적확한 말, 스토리의 전개방향으로 나가는 말, 인물들의 캐릭터와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들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 쉽고 담백한 주제와 한군데로만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고, 빙빙 들러대지 않고 바로 부딪치는 극적 묘미가 있다.

김수현 표 멜로드라마의 정서적 특성

인생을 날로 먹자고 덤비는 신데렐라 증후군의 인물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재벌 2세 부류 등은 모두 골이 빈 망나니들처럼 그린다든지, 결손가정의 자녀는 대체로 불량 비행(非行)청소년뿐인 것처럼 선입견을 만들어버린다든지, 전혀 리얼리티가 없는 엉터리 수박 겉핥기로 인물을 그려내는 드라마는 증오한다. 그 본질에 대해 책임질 생각 없이 대부분 지어내는 허구나 망상의 현실은 철저히 배격한다. 마치 그 인물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쩌면 그리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을까. 하다못해 가정부 급 역할이나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저 구석의 조연까지 모든 인물을 살린다. 등장인물, 즉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제구실을 하게 만든다.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고 아주 절묘한 균형과 대조를 이룬다. 가령 ‘사랑이 뭐길래’에서 객식구로 와있는 이모할머니들이 한 사람은 기독교신자로 ‘주님’하고 기도하면, 한 사람은 불교신자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다. 리얼리티가 없는 황당한 판타지나 있을 수도 없는 가상의 상황, 드라마를 위해 마구 날조한 인간 아닌 괴물들이 판치는 드라마는 단 한편도 쓰지 않았다. 바로 이런 요소와 노력들이 김수현드라마로 하여금 항상 탁월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김수현드라마는 리얼리티의 재미다. 김수현 표 멜로드라마도 그래서 재미있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애정문제를 그리면서도 철저한 리얼리티의 정서를 깔고 있어서 김수현의 애정 극들이 더욱 재미를 더한다. 리메이크된 ‘청춘의 덫’을 위시해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내 남자의 여자’ ‘불꽃’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완전한 사랑’과 ‘천일의 약속’이 그렇다. 가장 가까이서 믿었던 친구가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상대가 시한부 생명으로 꺼져가지만 지고지순한 애정으로 끝까지 함께한다거나, 기억을 잃어가는 연인을 사랑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이야기 등에서 김수현멜로드라마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건 결코 지어낸 가짜가 아니었다. 꾸며내고 지어낸 허구로 점점 팩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팩트에 더 가까워지려고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꾸미고 이어간다. 애정윤리도 철저한 리얼리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김수현의 멜로드라마는 순전히 애정행각에만 매달리는 멜로물이 아니다. 항상 그 기조는 가정에 바탕을 두거나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 그냥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대부분 홈드라마에다 멜로를 합친 ‘홈 멜로물’이다. 이 점에서 또한 김수현 멜로드라마는 때로는 실감나고 때로는 심금을 울리는 가슴 아픈 묘미가 있어서 여타의 숱한 멜로드라마과 차별화 된다. 여느 김수현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로 멜로를 다루는 것이지 앞 뒤 거두절미하고 오로지 애정만으로 내달리는 황당함 따위는 없다. 그래서 더욱 김수현의 멜로드라마들이 드라마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사람들이 김수현의 멜로드라마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여기서도 어김없이 차가운 현실감각으로 무장한 리얼리티를 앞세워 인간본질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김수현의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상황설정이나 감각적이고 생생한 언어, 직선적이고 솔직한 감정처리와 애정윤리가 재미를 준 부분도 없지는 않겠으나, 그 바탕에는 언제나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정서의 현실성과 리얼리티가 있었다.
“당신, 부숴버릴 거야” 대표적인 멜로물인 ‘청춘의 덫’에서 나온 이 한 마디가 두고두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잘 요약된 감정의 압축이 언어로 와닿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아마도 더 많은 소비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않았을까. 이리하여 멜로물도 역시 황당하거나 천박하지 않고 품격을 유지하는 명품들이 되었다. 수많은 당대 시청자들의 압도적인 호응을 얻은 것도 멜로에서까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정서적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신 상 일 (방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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