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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드라마 인문학(60)-TV드라마는 인간상을 만든다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60)-TV드라마는 인간상을 만든다
내용 TV드라마는 인간상을 만든다
작가 이은성이 만든 인물 ‘허준’


TV드라마를 쓰거나 연출하는 사람, 또는 연기하는 사람들 모두 그 버릇이 천태만상이다. 어떤 연출자는 녹화에 들어갈 때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요란하게 어깨를 들썩인다. 심지어 고함을 지르거나 해서 스스로 신명을 돋우는 사람도 있다. 침을 엄청 튀기는 사람, 손가락을 꺾거나 마주쳐 딸가닥거리며 장면전환 신호를 보내는 사람, 엉덩이를 반쯤 일으켜 세우고 마치 교향악단 지휘자처럼 두 팔로 포물선을 그리며 춤추듯 하는 사람....어찌 연출습관이 이 뿐이겠는가. 어떤 연출자는 한 쪽 손에 만년필을 들고 ‘큐’ 또는 ‘커트’ 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 잉크를 뿌려대 옆에 앉은 기술감독의 와이셔츠를 못 쓰게 만들지 않나.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원고를 쓰면서 자기가 스스로 감정에 젖어 매번 훌쩍훌쩍 울면서 쓰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초록색 잉크로만 글을 쓴 사람도 있다. 어떤 작가는 원고지에 번호부터 메겨놓고 기도를 하듯이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야 비로소 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꼭 새 작품을 쓰려면 어느 새벽 문득 고속버스를 타고 낮선 곳으로 가서 허름한 여관에 들어서야 쓰는 사람도 있다. 절대로 틀린 글자를 용납하지 않고 원고지를 찢어버리고 꼭 새 원고지에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작가도 있다. 그래서 그가 한편의 드라마를 탈고하고 나면 바닥엔 수북이 구겨버린 파지(破紙)가 쌓인다. 바로 그 버릇을 가진 작가가 1980년대까지 주로 사극 또는 시대극을 많이 쓴 작가 고(故) 이은성(李恩成)이다. 그는 원래 철로보선반 출신의 시나리오 당선작가로, 영화시나리오보다 TV드라마에서 일가를 이룬 작가의식이 투철한 작가였다. 덩치가 크고 손이 억세고 두툼해서 누가 봐도 글이나 쓸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질 않는데, 의외로 감정이 섬세하고 콤플렉스가 많아 술을 마시거나 할 때 잘 울기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콤플렉스는 순전히 학벌에서 오는 것이었다.


드라마 ‘허준’ 콘텐츠를 만들어낸 사람
TV드라마 작가 ‘이은성’을 아십니까


스스로가 밝힌 바에 의하면 제도권교육, 즉 정규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늘 그 부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를 괴롭힌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작가로서의 역량과 자부심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세종대왕’ ‘강감찬’ 등의 사극을 썼으며, 특히 선우휘의 ‘단독강화’와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 등을 각색해 TV문학관으로 내보낼 때는 원작 못지않은 찬사를 받을 정도로 탁월했었다. 그는 ‘거상(巨商) 임상옥’과 ‘예성강’ 등을 써서 진지한 자세로 인물들을 조명하고 나름의 인간상들을 드라마에 등장시켰다. 그러다가 찾아낸 그만의 인물이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이었다. 원래 허준이란 인물은 비천한 신분에서 조선시대 어의(御醫)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으로 기록에는 그저 몇 줄 정도의 행적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전해오는 스토리텔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런 인물에 작가 이은성은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TV드라마나 소설 등을 통해 알고 있는 허준이라는 인물은 순전히 작가 이은성이 창작해낸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시신을 몰래 해부해 직접 인체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라고 명령하는 스승 ‘유의태’라는 인물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 이은성이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허준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팩트(사실)이었지만 그와 관련된 모든 콘텐츠는 완벽하게 이은성이 만들어 낸 창작의 산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 속의 인물에 살을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고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드디어 하나의 인간상으로 완성해내기까지 앞서 그 습관에서처럼 얼마나 많은 원고지를 구겨버리고 파지를 쏟아내야 했을까. 몇 번이고 마치 쫒기는 도망자처럼 새벽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낯선 곳으로 출발하는 차표를 끊었을까. 그리고 엄청난 역사서적을 뒤지고 독파하고 증거 하러 다녔을까. 그 결과 맨 처음 나온 허준의 드라마가 1975년 김무생 주연의 ‘집념’이었다. 각종 한방에 의한 처방과 약재를 일일이 자막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드라마의 극적 구성과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진정성이 이런 기우를 충분히 덮고도 남았다.


드라마란 결국 새로운 인물의 캐릭터
매력적인 새로운 인간상을 만드는 것


엄청난 시청률과 폭발적인 인기를 독차지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비로소 ‘허준’이란 콘텐츠가 세상에 나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 다음해인 1976년에는 이순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1991년의 서인석 주연의 ‘동의보감’도 이 ‘허준스토리’를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작가 이은성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뒤였다. 동의보감 허준의 이야기를 ‘집념’이란 제목으로 드라마로 만들고 난 뒤, 그는 줄곧 지방신문에 소설로 연재하는 등 소설화 작업에 매달린다. 결국 그 책 ‘서설 동의보감’이 다 완성되지 못하고 끝마무리만 남긴 채 세상에 나와 근래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가 될 무렵 그는 심장수술을 받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그와 관련된 특집극을 쓰다가 쓰러져 그 길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가고 없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소설 동의보감’은 한동안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드라마가 소설로 재탄생해 이토록 주목을 받은 경우는 전무후무 할 것이다. 하나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창작한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1999년에는 전광렬이 주연을 맡은 64부작 드라마 ‘허준’이 나와 다시 한 번 세상을 감동시킨다. 2013년에는 첫 번째 허준드라마 ‘집념’의 주인공을 맡았던 탤런트 김무생의 아들 김주혁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구암 허준’으로 다시 탄생한다. 대(代)를 이어 주연을 맡은 셈이다. 드라마란 결국 새로운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고 매력적인 인간상을 자꾸만 만들어 내는 것. 그 덩치에, 그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술만 마시면 자주 울고, 단 한자의 오자(誤字)나 탈자를 남기지 않으려고 수없는 원고지를 구겨버려 매번 수북이 파지를 쌓이게 하는 버릇을 가졌던 작가 이은성! 원고마감에 쫓겨 새벽 고속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증발해버리는 버릇을 가졌던 그 집념의 작가 이은성은 그 불후의 작가정신으로 새로운 인물의 캐릭터, 새로운 인간상 ‘허준’과 허준의 영원한 스토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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