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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6)-김기팔(1)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6)-김기팔(1)
내용 인간 다큐드라마와 작가 김기팔

“밤새 뜬눈으로 지새다 신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시던 북녘 고향 저만큼 보이는 이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온전히 걷히지 않은 어둠을 지켜 끝내는 다가올/
찬란한 대낮으로 증거하시라.....”

‘검투사’처럼 드라마를 쓰다

마치 무슨 민주투사에게나 바치는 헌사 같다. 쓰기를 시인 김지하가 썼다면 조금은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지만, 얼핏 봐선 이걸 누가 드라마 쓰는 작가에게 바치는 비문(碑文)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버젓이 비석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다. 쓰는 걸 내팽개치고 길거리에서 무슨 민주화투쟁이나 벌인 작가도 아니었는데 그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공식명칭도 ‘김기팔 통일염원방송비’이다. 두고 온 산하, 이북 출신의 실향민이어서 그런지 비가 세워진 곳도 통일로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통일로변의 장곡공원 안에 드라마작가 김기팔의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1993년 12월 연말의 일이었다.
생전에 작가 김기팔(金起八)과 유별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그의 작품에 감복했거나 그의 인간적 풍모에 매혹되었거나, 그의 사회적 문화적 업적에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건 다 동의해도 ‘그의 인간적 풍모에 매혹되었다’는 대목에선 웃는 사람이 다소 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평범하지가 않았다. 때로는 괴팍했고, 때로는 엉뚱했고,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았고, 때로는 야생마 같았고, 때로는 정의의 투사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울기도 했다. 드라마작가 김기팔! 그는 오로지 작가였을 뿐이다. 작품으로 말하려 했고, 결코 작가정신을 굽히거나 팔아먹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친지나 지인 가운데는 작가 김기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로 그를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못난 것, 저속한 것, 유치한 것, 열등한 것, 가짜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수한 것, 참된 것, 당당한 것, 진짜만을 바랐다. 그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만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권력이나 금력에도 굴하지 않고 고고한 기개를 지켰다.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그는 지식인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인식했고, 특히 방송드라마의 기능이 어떠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던 그런 사람이었다.....”

TV드라마의 역할과 기능과 영향력을 정확히 인식

그래서 그는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정치드라마, 사회고발드라마를 개척해 사회적 파문과 함께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휴먼다큐 또는 인간다큐드라마를 진지하게 쓴 것이다.
가짜를 인정하지 않고 진짜만을 바랐기 때문에 엉터리로 지어내기 보다는 실존인물들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드라마를 썼다. 다시는 드라마를 안 쓸 사람처럼, 더 이상 다음 작품은 안 써도 좋다는 식으로 매번 그 드라마에 충실했다. 본명 김용남, 1937년 평양 출생, 공주중학교와 서울중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데뷔 무렵 ‘칠전팔기(七顚八起)’한다는 의미로 이름조차 김기팔(金起八)로 바꾸고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처절하게 겪어나갔다. 그는 좀처럼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작가로 태어났다.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중성도시’ 당선, 1960년 KBS 1백만환 현상 라디오드라마 공모에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함으로써 이후 방송드라마작가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는 1969년 잠시 신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훨씬 작가가 맞았다. 그는 라디오와 TV의 방송드라마에서 주로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다뤘다. 어떤 인물이든 작가 김기팔의 손에만 들어가면 참되고, 못나지 않고, 당당하고,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작가였다. 그래서 김기팔이 필봉을 휘두르면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대중과의 영합을 철저하게 거부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곧장 인기작가로 발돋움했다. 1991년 그가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해 12월 25일자 어느 일간신문의 칼럼. 드라마작가로는 보기 드물게 ‘어느 작가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작가 김기팔의 작가정신과 그가 남긴 드라마에 대한 글을 이렇게 실었다.
“그의 독특한 현실관, 인생관, 세계관이 사람들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을 감싸주고 긁어주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가 그렇듯 그의 생활신조도 힘센 쪽, 가진 쪽, 옳지 못한 쪽을 철저히 배격하고 약한 쪽, 옳은 쪽을 옹호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방송국 쪽에서 소외받고 있었던 많은 연기자들이 그의 강력한 입김으로 유명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그의 생활신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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