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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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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드라마의 인간과 문화
내용 김수현 드라마의 인간과 문화

신 상 일 (방송평론가)

드라마라고 해서 다 드라마가 아니듯이 작가라고 해서 모두 작가가 아니다.
단 한 편의 작품을 써도 영원히 작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수십 편의 작품을 썼어도 작가로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란 형태를 띠고 방송이 됐다고 해서 다 드라마냐 하면 물론 아니다.
드라마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 드라마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도 못하면서 마치 드라마인양 착각에 빠진 채 행세하는 그런 드라마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생활인으로서 좋은 작가의 작품과 만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운도 드물 것이다.
특히 재능이 뛰어난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과 일희일비할 수 있다면 한 시대의 대중으로서는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방송을 통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긴 작가 김수현과 그의 드라마들은 과연 어디에 속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이 점에 대해 본격적이고 진지한 분석이나 평가가 있지 않았다.
시간이나 양적으로 보아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그저 단편적인 가십이나 대체로 부정적인 단신기사 정도로 언급하고 지나간다는 것은 한 시절 숱한 대중의 갈채를 받은 작가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 순간순간 매료되었던 수용자에 대한 모독이며 대중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제 작가 김수현과 그의 드라마 세계를 들여다봄에 있어 새삼 이 분야의 문화비평과 평가를 방기했다는 때늦은 느낌을 결코 지울 수가 없다.

1. 텔레비전 드라마와 현실

작가 김수현이 방송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그 해 서울문화방송 개국 7주년 기념 라디오 연속극 공모에서 '저 눈밭에 사슴이'가 당선됨으로써 공식적인 방송작품 활동이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텔레비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72년 일일연속극 '새엄마' 부터였다.
물론 그전에도 예컨대 '무지개'라는 주간드라마 등을 쓰기도 했지만 드라마 작가로서의 김수현의 출발은 사실상 문화방송의 이 '새엄마'라고 보는 것에 그리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일일극 '새엄마'는 다음 해 12월 28일 까지 장장 4백 11회에 걸쳐 방송된 일일극 사상 아직은 최장수를 기록하고 있다.
장성한 아들딸들이 줄줄이 있는 집안에 재취로 들어온 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가정사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일일극들은 현실 문제를 그리지 않았다.
임희재의 '아씨'가 한 여인의 과거 생애를 눈물과 설움으로 반추한 한 많은 한국여인의 일대기였고, 한운사의 '아버지와 아들'은 일제와 육이오를 거쳐 오는 한 집안의 가족사로서 사람들의 눈길을 모은 당시의 대표적인 일일극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과거지향 적이었다면 김수현의 '새엄마'는 결코 과거가 아닌 현실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텔레비전 일일극 속에 과거를 보내고 현실을 끌어들여 공감대를 형성한 하나의 성공적인 변화의 예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 특히 연속극은 대사극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가정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과거가 아닌 '바로 지금' 즉 현실성을 먹고사는 일종의 설득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런 전제를 놓고 본다면 김수현의 '새엄마'는 단순한 장수 일일연속극 또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홈드라마로의 회귀가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의 중요한 기능면에서 하나의 발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김수현은 이 '새엄마'에서 인간을 그리고 있다.
평범한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조용하게 처리하고 있다.
처신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새엄마로서 살아가는 지혜와 노력과 의지를 정성을 다해 다루고 있다.
무릇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떤 정서적인 역할을 현실 속에서 해야 하는가를 비로소 보여주는 재미를 주면서 사람들은 그가 쓰는 드라마에 친근해지기 시작하는 즐거움을 갖게 된다.
입장이 어려운 재취 며느리를 사려 깊은 한국적 시어머니의 눈길로 감싸면서 따뜻하고 엄격한 질서를 지켜나가는 모습.
부정적인 갈등 보다는 긍정적인 보살핌으로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시절 한국 가정의 은근한 정을 바탕으로한 애환.................
여기에는 무서운 절제의 기법이 동원된다.
주인공 여인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돌아서서 열심히 마루에 걸레질을 한다.
그 뒷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더 많이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려준다.
적당한 절제와 상상력을 이용한 심리적 교란이 있다.
그리고는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한다.
당시로서는 거의 맛보지 못한 안방 드라마의 문화적 체험이 등장한 것이다.
방송언어는 쉬워야 하고 짧아야 한다.
또한 시각적이어야 하고 글이 아닌 말이어야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언어여야 하고 살아있는 감각과 매력이 있어야 한다.
대사가 필수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일수록 말이어야 하고 글이어서는 안 된다.
방송드라마란 순수한 예술적 측면과 동시에 메시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 적 성격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고받는 말들이 마치 그림을 보듯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김수현 드라마 제국'은 무엇보다도 텔레비전 드라마의 기술적 특성을 천부적으로 깔고 있었기에 가능했고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찰과 관조, 애정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지극히 작가적인 시각으로부터 그의 작품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막연히 신비스런 대상으로만 보고 있던 사람들이 용의주도하고 철저하게 텔레비전적인 이야기보따리를 만나게 된 셈이다.
그 속에 자신들의 말이 있고 가슴이 있고, 자신들의 사랑과 미움, 현실과 이상, 꿈과 생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차츰 차츰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멀지않고 가까운 얘기, 거창하진 않지만 절실한 얘기,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정감이 흐르는 얘기,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자기와 이웃의 생생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텔레비전 연속극에 재미를 붙이게 하는 흡인력으로 작용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시기적으로 보아 김수현의 드라마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를 텔레비전 연속극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선 열거한 몇 가지 이유에서 그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연속극의 새로운 장을 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
김수현의 '새엄마'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는 한국사회의 하나의 환경으로서 자리 잡는다.
마치 시계처럼, 계절처럼, 생활의 리듬을 함께하는 존재가 된다.
별다른 오락이나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드라마를 찾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생활정보나 지혜를 얻으려는 초기 텔레비전 수용자로서의 욕구를 갖게 되면서 김수현의 일상사적 드라마는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이 모두가 다분히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방송적인 특성을 드라마 속에 적절하게 담아냄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방송이 현실에 충실하고 현실의 표현이며 생활의 비판이라는 매체 스스로의 특징을 드라마 속에서 최대한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김수현 식 텔레비전 드라마 특히 연속극의 전성시대가 열릴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는 일련의 시대물이나 사극처럼 과거에 바탕을 둔 형태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설사 그 배경이나 무대가 과거라 해도 현실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텔레비전 드라마로서의 역할을 다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동시대의 생활인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드라마라야 진정한 의미의 텔레비전 드라마로 이해된다면 김수현의 현실 즉 '바로 지금'의 인식은 소중한 하나의 각성이기도 하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박물관 뜰에 놓인 대포가 아니다.
무료한 노인의 나라에서 복지만을 먹고사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열심이며 그것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다양한 인간들이 각기 제 생각과 개성대로 살아가고 있다.
철저한 현실에서 출발하려는 그의 드라마에 대한 인식에서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환경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애정

'새엄마' 이후의 김수현은 거의 쉴 틈이 없다.
대충 일 년이 넘는 한 편의 일일연속극이 끝나고 나면 불과 한달 사이에 새로운 연속극을 시작한다.
가히 살인적이고 초인적인 왕성한 활동이 아닐 수 없다.
1973년 12월 28일에 4백 11회에 걸친 '새엄마'를 끝내고 나서 불과 한 달 뒤인 1974년 1월에 다시 '강남가족'이란 일일극을 시작한다.
구조상 전작과 흡사한 홈드라마이지만 내용은 어느새 새로운 분위기에서 출발한다.
작가 스스로 가장 인상에 남는 초기 작품이라고 할 만큼 인간애와 가족애가 묻어나는 따뜻한 드라마다.
한 평범한 공무원 가정을 중심으로 여성이 아닌 가장이 기둥 인물로 등장하는 일종의 변신이라면 변신이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홈드라마였다면 그 후로는 홈드라마와 멜로드라마를 번갈아가면서 쓰거나 이른바 홈 멜로물이라고 할 수 있는 혼용형태거나 멜로드라마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1974년의 '수선화'와 1975년의 '안녕'에서 그의 멜로적 성향을 강하게 내보였다가 다시 1975년에 '신부일기'라는 홈드라마로 돌아가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1976년 '여고동창생'이라는 멜로에 가까운 드라마로 갔다가 그 다음해인 1977년에 '당신'이라는 홈드라마로 작품적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청자들은 김수현 드라마에 길들어 간다.
그 후 다시 '청춘의 덫'이나 '후회 합니다'와 같은 멜로드라마로 가지만 짧게 끝내고 1979년 '행복을 팝니다.'라는 새로운 형식의 홈드라마로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여기서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시대의 흐름이라는 상관관계를 보게 된다.
1975년 3편의 연속극이 거의 동시에 단축 또는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하나는 물질적으로 성공한 유부남과 미혼 여성의 불륜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부남과 가정교사의 애정, 다른 하나는 고부간의 갈등을 진부하게 그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김수현의 '안녕'도 그 가운데 하나다.
실상은 당시의 시대상을 나름대로 반영한 드라마라고 하겠는데 방송드라마 특히 단발물이 아닌 연속극이 갖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역기능이란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고, 방송에 대한 타율적 통제가 극심하던 때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 부분 텔레비전 드라마의 현실반영에 대한 제약과 사회성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 무렵이 바로 유신시대다.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현실 때문에 불가피하게 드라마 속의 현실 즉 가공의 현실을 때로 현실인양 그려내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또 매체 자체가 갖는 스스로의 통제는 반드시 단점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부분도 있어서 한계 속의 맛을 얼마나 내느냐가 중요한 때였다.
무릇 텔레비전 드라마는 특정인만을 상대로 하는 분야와는 달라서 보편적 문명이나 가치 속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김수현의 드라마는 단연 믿을 만하고 돋보인다.
김수현 드라마의 극단성이 때로 시비 거리가 되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많은 시청자가 손을 들어주는 이유는 그의 드라마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와 모럴과 일정한 수준을 신뢰한다는 증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드라마 속에 녹아 있는 인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애정이다.
김수현 드라마가 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그것은 곧 작가가 얼마나 인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를 뜻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관찰을 통해 터득한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김수현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가 살아있다.
지위나 신분, 주역이냐 단역이냐에 관계없이 심지어 악역 까지도 완전한 인격과 인권이 골고루 부여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실감나게, 자기주장을 타당성 있게 펴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부분을 군데군데서 유감없이 묘사하고 있다.
가령 아내를 괴롭히는 무지막지한 인물을 실감나게 그리되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의 정 까지는 끊어버리지 않는다.
특히 1984년부터 시작된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등에서 이 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설사 그가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라 할지라도 근원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은 깔려 있다. 그래서 드라마는 재미있다. 김수현 드라마가 더욱 그렇다.
이것은 김수현 만의 비법이거나 전유물이 아니다.
드라마의 기본이며 작가의 기본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궁극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없다면 처음부터 성립이 불가능하다.
여기서도 김수현 드라마는 무엇보다도 기본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쓴 드라마가 홈드라마든 멜로드라마든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역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임을 그의 작품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어설프거나 정이 헤프다는 얘기는 아니다.
때로는 냉정하고 엄격하면서도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노력이 있다.
그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구경꾼이 아니다.
모두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갈등도 생기고 목소리도 높아지지만 그것은 결국 작가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애착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의지가 있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자칫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깊은 애정에서 생겨나는 역설적인 냉정함이고 엄격함이다.
그러나 상처주지 않겠다는 선은 분명히 긋고 있다.

3. 대사의 생명력과 명징 성(明澄性)

텔레비전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대사극이다.
영상은 영상이되 영상언어라기 보다는 대사를 통한 언어에 가깝다는 얘기다.
단적으로 말해 그림 위주가 아니라 상황과 성격, 일상 언어를 통한 이야기적 요소가 강하다.
여기서 말하는 대사극이란 반드시 말수가 많다거나 대사의 분량이 많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말이 없는 그 자체가 대사가 될 수 있고, 표정이나 행동 또는 동작 자체가 대사의 역할로 나타나는 것 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영상언어 보다는 대사언어가 주류를 이루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흔히 작가 김수현을 '언어의 연금술사'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대사의 생동감과 적확 성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분명 언어감각이 탁월하다.
그가 쓰는 말에는 생명력이 있고 말 자체가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적당한 긴장과 여유, 그리고 압축과 생략이 주는 모국어의 묘미를 생생하게 살려내는 재능이 번득인다.
간결하면서도 빠른 전개, 직격탄 성격의 대사를 통한 상황의 반전을 수시로 꾸며댄다.
대사 속에 인격이 있고 기승전결의 긴장감이 있다.
그가 쓴 숱한 드라마의 모든 대사를 다 열거하지 않아도 강력한 언어 구사력을 얼마든지 만나게 된다.
가령 드라마 '작별'의 경우에서 몇 가지 예를 보자.
“당신 입 조그마해져서 눈 세모꼴로 얘기 안 했으면 좋겠다.”
“그 지지배 내 머리 꼭대기에 있어.”
이상 두 가지 종류의 대사는 시각적인 언어다.
상대방의 성격과 특징, 지금 처해 있는 상황과 관계를 팽팽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면서 대사는 스토리의 진행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 역시 텔레비전 드라마의 기본중의 하나다.
그 이상의 대사,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역할과 기능을 하지 않는 대사는 군더더기며 필요하지 않는 대사다.
속사포처럼 쏘아대고 미끈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대사가 아니다.
유행어를 적당히 섞어가며 말장난을 한다고 해서 살아있는 꼭 필요한 대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상 언어가 아닌 환상적인 표현, 뜻풀이를 해야 알 수 있는 말을 남발한다고 해서 대사의 품위가 있고 구실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극의 진행과 관계없는 대사는 이미 대사가 아니다.
동시에 품위를 잃지 않은 정확한 생활언어를 적재적소에 쓸 때만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때로 김수현 아류의 대사를 구사하는 다른 경우의 작가들을 보면 대사의 본질이 확연히 구분된다.
작가란 여러 사람을 대신해서 끝없이 질문하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김수현의 대사에는 항상 그런 질문이 담겨 있다.
빙빙 둘러오는 대사는 드물다.
그것이 김수현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는 입장에 항상 서 있다.
그의 대사는 언제나 육체 화 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축적해 나가고 있다.
타당성 분석이 끝나 있는 상태며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
그의 대사는 항상 말하는 인물에 동화되어 있으며 명확하고 간결하다.
순간순간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으며 말의 리듬과 템포 까지 내포시키고 있으면서 풍부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드라마란 근본적으로 허구지만 99%의 허구와 1%의 진실을 요구한다.
이 1%의 진실이 있어 전체가 생명력을 지니고 감동을 준다.
바로 이 1%의 진실을 추구하는데 있어 대사는 절대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여러 인간 군상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풍부한 인간 탐구에도 성공' 하려면 대사의 맛과 기능을 유감 없이 발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생에 대한 관조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작품의 흐름 속에 녹아나게 하는 수단으로서 만의 대사가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성격 표현과 감동을 일으키는 드라마의 생명력을 위해 김수현 드라마의 대사는 존재한다.
무릇 작가란 기술만이 능한 것을 자랑삼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기능공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인생의 관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가치와 메시지를 지니는 사람이다.
올바른 대사란 입이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인생의 언어이지 기술적인 언어의 유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김수현 드라마의 대사는 이런 점에서도 차별화 되는 것이다.

4. 멜로드라마의 진수

김수현 드라마 30년을 10년 단위씩 3등분 한다면 초기 10년은 그래도 많은 부분이 홈드라마 쪽에 기울어 있다.
작품의 숫자나 양을 기준으로 하기 보다는 시청자의 소구력이나 친밀도 면에서 중간 중간 섞여 있는 멜로 또는 홈 멜로물 보다는 순수한 홈드라마 쪽이 훨씬 강세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작가의 생활 주변, 시대의 변화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는 이런 단계에서 본다면 홈드라마 시절은 어쩌면 사회의 다양성이나 산업화에 있어서 가내 수공업적이고 가족 집약적인 구조에 머물러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박하고 잔잔한 흑백의 화면처럼 그렇게 정감 있는 세월을 그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10년인 1980년대 초반부터는 컬러텔레비전의 등장과 더불어 드라마의 환경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 외적 요인이 생긴다.
작가의 체험세계와 관심, 생활 패턴도 자연스럽게 달라졌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해 가고 있었다.
컬러텔레비전이라는 기술적 시각적 변화 보다는 생활인의 의식에 커다란 빈터가 생겨나고 있었다.
종래의 흑백 식 홈드라마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김수현은 다시 한 번 변화를 시도한다.
그는 항상 변화나 변신에 있어서도 선험적이고 앞서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문명복제를 싫어하는 편에 서서 늘 한 발짝 앞서려는 시도에 도전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스스로 드라마적 문명사를 만들어 나가는 작가다.
남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복제하는 행위를 거부하면서 때로는 낙후된 자들의 몰이해에 부딪치기도 했다.
컬러 방송시대의 문을 열면서 1981년 MBC-TV의 신년특집극 '첫손님'을 내보내고, 다시 KBS-TV에서는 3부작 특집극 '옛날 나 어릴 적에'를 써서 노인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느 새 달라진 우리네 가족관계의 모럴과 구조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고 새로운 10년의 포문을 연다.
하지만 이런 특집극과 같은 테마는 잠시였을 뿐, 적어도 80년대의 그의 관심은 멜로드라마 쪽에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적 멜로드라마는 어디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김수현이 1984년 5월부터 85년 11월 까지 썼던 '사랑과 진실'은 바로 이런 컬러 시대의 한국적 멜로드라마 불모지대에 불을 지르고 새로운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운명이 뒤바뀐 두 자매의 대조적인 성격을 중심으로 터질 듯한 긴장감을 수용자에게 요구하면서 무려 76%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올리기 시작한다.
시청률이 50%니 60%니 하는 것도 김수현 시대에 와서 수립된 놀라운 현상이다.
그만큼 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에 끌어 모으는 흡인력이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87년 다시 그 '사랑과.....'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야망'이 등장한다.
주말은 완전히 김수현의 시대였고, 김수현 드라마가 천하를 평정하던 시절이었다.
일련의 김수현 멜로드라마의 성공으로 그 때까지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판도와 패턴이 바뀐다.
'사랑과 진실'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뤘다면 '사랑과 야망'은 두 형제 즉 남성들을 중심으로 펼쳐나가되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 드라마였다고나 할까.
드라마가 '기대감에 대한 끝없는 배신'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불문율을 철저히 지켜 묘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과연 다음에 무엇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 예측을 불허했고, 이러겠지 라는 기대를 그야말로 산산이 부수면서 끝까지 끌고 간 상업적 드라마의 진수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사이 우리의 생활 속에는 70년대와는 다른 탐욕과 물질이 들어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일련의 '사랑....' 시리즈로 컬러텔레비전 시대의 한국적 멜로드라마의 충격에 잠시 휩싸이게 해버리는 위력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김수현 드라마의 배경과 무대다.
당연히 등장하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른바 서민의 언저리에서 어느새 중류 이상 또는 상류층 사회로 옮겨와 있었다.
작가 자신의 생활 변화나 사회나 시대의 변화, 또는 지향하는 삶의 기대치에 대한 소급만족일 수도 있다.
사실 그 이후로는 김수현 드라마에서 저 70년대 그의 드라마에서 나오던 정든 한옥집이 있는 골목길이나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상류사회나 상류계층을 무대로 그들의 이야기가 다뤄지기는 했어도 누런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만원버스를 타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종래의 김수현식 홈드라마 신봉자들한테는 여간한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저만치 앞서가 버렸다.
그 대신 멜로드라마의 재미는 맛을 보여준 상태였다.
김수현 드라마가 하나의 패션으로 남아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돌아다니는 현상이 한동안 지속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멜로물들이 소재나 구조면에서 전작을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하느냐 하면 결단코 그렇지는 않다.
매번 다른 이야기를 새롭게 펼쳐가는 천부적인 재주 바람에 그는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작가'라는 소릴 듣는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소생하고, 그 남편의 병간호에 지친 아내의 사연이 얽힌 '배반의 장미'도 대충 이 무렵에 나온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5. 사회성, 시대성 그리고 '김수현 주의'

김수현 드라마에는 아류가 없다.
그의 드라마에는 고정관념이 없다.
일체의 스테레오 타입을 거부한다.
자신의 작품에서조차 닮은꼴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나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흔들리지 않는 기본 속에서 오로지 고집스러운 것은 조금씩 또는 크게 다른 것을 노리는 모색이며, 그것이 그의 드라마를 아끼는 수용자의 흥미를 끈다.
김수현의 드라마에는 각색이 없다.
습작수준을 허용치 않는다.
오리지널 창작이 있을 뿐이다.
그의 완숙 미 추구는 시청자에 대한 경외감이다.
그의 드라마 제국에서는 오로지 자기만의 것이 있다.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이 있고, 갈등을 빨리 시작하고, 과정을 지루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을 저지르고 본다.
그러고 나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력투구한다.
전폭기처럼 수직 이륙하는 것이 아니라 여객기처럼 활주로를 타고 서서히 이륙해 오래 그리고 멀리 비행한다.
이것이 사회성과 시대성을 갖춘 '김수현 주의'의 비결이며 요체다.
서둘지 않고 시청자의 가슴에 파고드는 카리스마를 갖고 최대한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 속에 김수현 드라마의 인간과 문화가 있다.
1990년 11월부터 92년 5월 까지 약 1년 6개월간 방송한 '사랑이 뭐 길래'로 그의 드라마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변화'라는 말이 부족할 만큼 김수현 드라마의 세 번째 10년은 대단히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198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가 여기에 해당되겠는데, 1990년 11월에 시작한 '사랑이 뭐 길래'는 그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사랑이 뭐 길래'에서 보듯이 코믹 터치로 전환을 시도한 것이 그 첫 번째 변화다.
사람들은 흔히 이 '사랑이 뭐 길래'를 놓고 코믹 홈드라마의 새 장르를 개척했느니 하지만 정작 그로서는 조금도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드라마 전반을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벼움 속에 페이소스가 있고, 생활의 어두운 그늘과 무게 속에 잔잔한 미소가 순간 스치면서 의지가 강하게 이어가는 식이다.
이른바 '김수현 신드롬'이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온 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그가 그 어느 시기보다 이 무렵 즉 1990년대에 들어와서 부쩍 사회나 시대적인 곳으로 눈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본격적인 사회성이 있는 작품을 썼다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사회와 관련된 시의성 얘기를 툭툭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의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다.
'사랑이 뭐 길래'와 같은 경쾌함이 있는가 하면, '산다는 것은'과 같은 생활의 부대낌이 있는가 하면, '작별'과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슬픈 얘기도 나온다.
다시 '목욕탕 집 남자들' 같은 코믹 터치가 주목을 받는가 하면, '어디로 가나'와 '인생'과 같은 특집 성 단발 물에서는 진지한 사회 시대적인 문제 제기와 함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SBS-TV와 케이블 현대방송에서 시차를 두고 같은 시기에 방송한 '사랑하니까'에서는 심지어 현실과 영혼세계라는 시공을 초월한 무대를 오가며 삶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이 세 번째 10년의 의미는 방송드라마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지극히 평범하거나 소외받는 계층으로부터 상류층에 이르기 까지 골고루 모든 계층의 삶을 다루지만, 드라마의 주류는 역시 대다수 수용자의 이야기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어설픈 감상주의나 기술적 패션 즉 유행에 민감한 드라마 스타일 보다는 기본을 중시하는 다양한 인간 중심의 드라마가 언제나 정석이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여러 번 바뀌어도 드라마는 드라마다.
순간적인 유행이나 잔재주에 따라 부침하고 영합하려는 경우는 작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기성이 농후한 기술자일 뿐이다.
작가란 항상 자기의 목소리가 있어야지 마치 드라마가 무슨 조립식 가건물이나 되는 것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아이디어맨이나 대필자가 되어 여기저기서 기발한 남의 생각들을 주어모아 조립하는 그런 행위를 작가인양 여기는 아마추어적 병폐에 김수현의 드라마와 작가적 수준은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6. 삶과 죽음에 대하여

김수현 드라마 30년은 알게 모르게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김수현 드라마의 변천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많은 계층에 그대로 투영되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 어떤 매체나 인물보다도 한국인의 정서와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데 김수현의 자리는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한꺼번에 그 많은 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에 불러 모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평가나 합당한 관심을 가졌던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현 드라마는 처음부터 완숙미를 갖추거나 추구하려고 했지 연습 삼아 해가면서 늘거나 세련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내용에 있어 다양성이 반영되었을 뿐 '살아가는 이야기' '인간의 이야기'라는 기본적인 명제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그리고 인간을 미워한 작품도 쓰지 않았다.
때로는 서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때로는 이른바 상류층의 생활을 다루어도 인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나 애정은 작품마다 비교적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
이것이 김수현 드라마의 장점이자 기본 모럴의 하나다.
최근에 쓴 그의 드라마를 보면 그가 두어 가지로 인생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뭐 길래'와 '목욕탕 집 남자들'처럼 인생을 즐겁게 보려는 경향과 '어디로 가나' '인생'과 같은 단발 물에서 보여준 인생에 대한 진지한 접근, 이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특히 최근에 삶과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주 다루기도 하고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김수현의 작품을 양적으로 많은 연속극에 의존해 함부로 판단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최근에 그가 쓴 '어디로 가나'와 '인생' 같은 단발 물 말고도 이미 '말희'나 '불행한 여자의 행복' 같은 단막극에서 김수현 드라마가 보여준 인간과 문화에 대한 작가적 시각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가 앞으로 그야말로 '국민적 드라마'를 쓰는 국민작가로 남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만큼의 폭넓은 공감대와 긍정적인 찬사를 골고루 받는 작품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는 관조가 아니라 다분히 현실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다뤄진 경향이 없지 않다.
가령 말기 암환자와 그의 가족 또는 주변 이야기를 다룬 '작별'에서도 비록 아픈 현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살아있는 자들의 생활과 어우러져 동시에 굴러가고 있다.
그러기에 더 슬프고 더 살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한다.
삶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하나씩 살아 있는 가치를 부여해 간다.
이제 김수현 드라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삶에 대한 긍정적 시각의 확산에 까지 와 있다.
앞으로 더 그의 드라마가 무엇을 담아내고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는 순전히 작가인 그의 몫이다.
다만 일반 시청자로서는 오래오래 재미있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쓰는 재능 있는 작가와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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