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인문학(16)-이은성(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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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작가 이은성에 대한 회고에서 이렇게 썼다. 작가 이은성은 심장으로 글을 썼다고. 마치 탱크가 굴러가듯 쿵쿵 힘찬 소리를 내며 심장으로 글을 썼다고. 그는 결코 손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얄팍한 재주로 글을 쓰지 않았다. “항상 심장으로 들이댔고, 그래서 작품기획부터 심장을 들이대야 성립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선 작가 이은성은 이른바 육척거구다. 틀림없이 철도보선반에서 일했을 것 같은 막노동꾼의 덩치다. 그 덩치가 방송사 작가실의 작은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고 있는 뒷모습을 보면, 책상 앞에 앉았다기보다는 마치 책상을 끌어안고 있는 듯 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작품에 대한 확신과 고집 또한 거대한 바위와도 같았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은성의 작품을 멋대로 수정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토씨 하나라 할지라도 허락받지 않고는 어림도 없었다. 이런 고집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평소 그의 작업, 즉 글 쓰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남들은 정해진 분량 채우기에 급급할 때가 대부분인데, 작가 이은성은 정해진 매수보다 항상 넘치게 쓰고는 거꾸로 압축해나가는 식이다. 그만큼 항상 쓸 것이 많고 욕심이 많았다고나 할까. 대부분 철철 넘치게 쓰고는 색연필로 지워나간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안 들어 거의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쓸 때도 있다. 조금도 아까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술은 당시 방송사들이 몰려 있던 여의도에서 여럿이 어울려 마시기보다는 뚝 떨어진 집 근처나 신촌쯤에서 한 두 사람끼리 조용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그러고는 안주로 족발을 시켜 그 두툼한 손으로 잡고 마구 뜯는다. 아주 맛있게 잘 먹는다. 어쩌다 노래 부르는 술자리에선 그의 애창곡 ‘한오백년’을 불렀다. 구구절절 한이 맺혀 가슴을 치는 창법이다. 무슨 한이 그토록 절실하게 맺혔을까.
미련과 고집으로 지키려 한 작가정신 아마도 대쪽같이 살아온 자신의 작가관이나 작가정신을 지키기 어려워서 맺힌 한(恨)일 거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1976년 드디어 MBC-TV에서 ‘집념’이란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다. 그 바로 직전에 같은 MBC에서 ‘예성강’이란 드라마를 내보내고 곧바로 시작한 드라마가 ‘집념’이었다. 그러니까 이 ‘집념’이란 드라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막극도 아닌 연속극으로 금방 써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드라마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방(韓方)에 대해, 한의학(韓醫學)에 대해 잘 몰랐다. 설사 관심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어떻게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자신이 없고 회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은성은 자신만만했다. 조선시대 임금의 주치의 어의(御醫) 출신으로 한의학의 교본 ‘동의보감’을 쓴 ‘허 준’의 일대기! 한의학도 한의학이지만 그 인물의 생애를 필생의 역작으로 남길 준비가 돼 있었다. 전문적인 의학용어나 약재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고, 그보다는 한 인간의 시련과 가치를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이미 복안이 서 있었다. 그렇다고 ‘허 준’에 대한 기록이나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의원(醫員)이 있어 우리 고유의 한의학 서적인 ‘동의보감’을 남겼노라 정도의 극히 짧은 기록 밖에 찾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작가의 몫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히 한의학이나 약재가 아닌 그의 생애부분은 고스란히 작가가 창작해내야 할 부분이었다. 작가 이은성은 그야말로 집념을 가지고 이 최초의 한의학드라마, 위대한 의학정신을 가진 한의사 허 준에 매달렸다. 국민드라마 ‘허 준’ 스토리 네 번이나 방송 그때까지 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이 드라마가 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였다. 불과 몇 줄에 지나지 않는 지극히 간략한 기록을 근거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실이 최초의 ‘허준드라마’ 집념으로 나타났다. ‘집념’의 허준이야기는 99%가 작가 이은성의 창작이다. 드라마 ‘집념’이 방송되자 사람들은 우선 TV드라마의 격조와 품위에 대해 새삼 놀랐다.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극적구성과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숨을 죽이고 몰입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의학에 대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해박한 지식과 정보까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고 유익한 드라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집념, 집념’이었다. 덕분에 극중 ‘허준’역을 맡은 성우출신의 탤런트 김무생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나중에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2013년에 네 번째 드라마로 만든 일일연속극 ‘구암 허준’에서는 김무생의 아들 김주혁이 아버지가 맡았던 ‘허준’역을 맡아 열연했다. TV드라마만 네 번 제작된 셈이다. ‘집념’ ‘동의보감’ ‘허준’ ‘구암 허준’ 등이었는데, 특히 그 가운데 최완규가 각색한 ‘허준’은 완벽한 국민드라마로 등극했었다. 탄탄한 원작에다 시대와 제작여건에 맞게 만들어 온 국민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허준스토리의 흥미진진함을 실감케 해주었다. 허준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이은성원작의 ‘허준’을 능가하지 못했다. 한의학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 때문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작가 이은성의 집착과 창작력 때문이었다. 그만큼 드라마로서의 ‘허준’에는 이은성의 땀과 노력이 스며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이야기들로 가득 찬 드라마였다. 허준은 반쪽짜리 양반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쫓겨 경상도 산음(지금의 산청)까지 흘러간다. 반쪽짜리 양반이란 아버지가 양반이고 어머니는 노비신분으로 조선시대와 같은 계급사회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른바 출세할 길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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