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인문학(27)-한운사(2) | |
내용 |
‘레만 호(湖)에 지다’ ‘하베이 촌의 손님’ 등
일제와 전쟁과 인간, 분단의 비극에 천착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드라마작가로서의 한운사를 뚜렷하게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도 다뤄지지 않은 일제 말기 소위 태평양전쟁을 지성의 시각에서 드라마로 썼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특유의 대사와 휴머니즘과 낭만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들었다. 완전한 허구가 아닌 특정시대와 누군가의 삶을 작품의 모티브로 가져다 쓰고, 가능하면 실제인물을 모델로 한편 한편의 드라마를 구축해나갔다. 황당무계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에 발을 디딘 리얼리티를 중시한 것이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계속해서 2탄, 3탄의 속편을 낳았다. 이번엔 방송이 아닌 인쇄매체 쪽에서 작가 한운사를 주목했다. 일간신문에서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속편이랄 수 있는 ‘현해탄은 말이 없다’를 연재했고, 당시 지식인들의 월간잡지로 꼽히던 ‘사상계’에서는 제3편인 ‘승자와 패자’를 실었다. 원래는 이 잡지에 실리기 전 제목이 ‘현해탄아 잘 있거라’로 현해탄시리즈 종결 편다운 제목이었다. 한편의 드라마로 시작된 ‘현해탄 시리즈’가 영화와 신문, 잡지로까지 이어지는 일대 선풍 내지는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1968년에는 KBS-TV에서 현해탄시리즈의 주인공 이름을 딴 ‘아로운(阿魯雲)’이란 제목을 달고 TV드라마로 재탄생되었다. 모든 매체를 휩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한운사의 드라마는 도도하게 다가왔다. 마치 시대와 사회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지성처럼 그 내용과 작품의도에 있어서 한 마디로 거창한 테마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드라마를 보는 눈높이를 업그레이드 시켰으며 그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현해탄 시리즈’로 매체들을 누비다 낭만과 휴머니즘으로 무장하고 일제말기의 전쟁 얘기와 함께 그가 드라마에서 관심을 둔 것은 육이오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과 그 치유에 있었다. 이미 6.25를 소재로 한 ‘이 생명 다 하도록’과 반전사상을 다룬 ‘어느 하늘 아래서’가 방송되었고, 1962년에는 부산피난살이를 다룬 파격적인 멜로드라마도 등장한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배우 신성일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으며 공전의 히트를 친 ‘아낌없이 주련다’가 바로 그 드라마다. 피난지 부산에서 연상의 과부와 연하의 총각사이에 벌어진 연애사건은 아마도 그 작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한운사드라마의 행보는 늘 파격적이었다. 그 1962년에 6.25 때 한국공군의 전투비행단 이야기를 다룬 저 유명한 ‘빨간마후라’가 나온다. 공군전투기가 쌩쌩 날아다니는 드라마는 역시 처음이었고, 이 모두가 사실상의 모델이 있거나 자전적인 체험이 보태진 드라마들이었다. ‘빨간마후라’는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최초의 공군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빨간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마후라/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이 주제가는 삽시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특히 한국공군에서는 자신들의 긍지를 나타내는 군가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그 후로도 한동안 한운사의 드라마에는 육이오를 소재로 하거나 그 전쟁후유증 치유와 남북분단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 적지 않았다. 역시 육이오의 비극을 다룬 ‘하얀 까마귀’(훗날 영화로 제작), ‘산하여 미안하다’ ‘머나먼 아메리카’(훗날 TV드라마 ‘하베이 촌의 손님’) 등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1964년에 방송된 ‘남과 북’을 잊을 수가 없다. 육이오전쟁과 남북분단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휴전회담이 진행 중인 전쟁의 막바지에 어둠을 뚫고 최전방 아군진영의 부대에 북측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넘어온다. 그는 반대편 북측부대의 정보장교로 품속에서 사진 달랑 한 장을 꺼내며 이 여자를 찾아주면 적군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적군의 장교가 죽음을 무릅쓰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여인을 찾아 귀순해온 것이다. ‘남과 북’....육이오와 분단의 아픔에 나름의 치유를 계속하는 드라마들 그러나 그간의 사연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찾고 보니 운명의 그 여인은 사나이를 처음 맞이한 이쪽 남한부대의 중대장 부인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을 알고 그 여인을 남쪽의 남편에게 부탁하며 빗발치는 격전장 속으로 몸을 내달려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 상황은 종료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8시간. 48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드라마로 농축시켰으니 얼마나 긴박하게 드라마가 진행되었겠는가. 짜임새 또한 일품이었고, 아군과 적군을 떠나 그 속에 흐르는 사나이의 멋과 낭만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물론 영화화되어 엄청난 관객을 끌어 모았고,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분단의 아픔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백미로 이 ‘남과 북’의 극본을 연구 자료로 가져가기도 했다. 1971년 당시 TBC-TV에서 다시 TV드라마로 만들기도 했고, 그로부터 한참 뒤인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 극단에서 연극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방송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으레 틀어대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바로 이 ‘남과 북’이라는 드라마의 오리지널 주제가이다. 한운사의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른 후의 후유증까지 다루고 또 다뤘다. 1969년 TBC-TV가 방송한 TV드라마 ‘레만 호에 지다’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스위스에 만나게 되는 남북한 양측의 남녀외교관이야기다. 전쟁 전 사랑하던 사이였던 이들은 전쟁으로 헤어졌고, 그로부터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기가 막히게도 각자 상대방이 속한 남북한 두 나라의 외교관으로 만나게 된다. 여자는 북쪽의 외교관, 남자는 남쪽의 멋쟁이 외교관으로. 그들 사이엔 풀어야 회포도 많고 다시 합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로 그들의 재회와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한운사의 드라마는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시대와 사회성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그럴수록 드라마의 향기는 한때 국민들을 홀리게 되었고 바로 그 한 가운데 한운사의 드라마가 자리잡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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