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인문학(54)-최창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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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의 전설로 남은 인물 ‘최창봉(崔彰鳳)’
PD에서, 부장, 국장, 사장까지 거친 산 증인 그가 주도적으로 개국(開局)에 관여해 산파역을 맡은 방송사만 해도 자그마치 셋이나 된다. 방송사 하나만 문을 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그는 무려 세 방송사의 개국을 이끄는 사실상의 핵심멤버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일찍이 한국최초의 텔레비전방송사였던 HLKZ-TV가 1956년 5월 12일에 문을 열었을 때, 최창봉은 사원으로 뽑혀 연출과 편성과장을 맡았었다. 물론 이 방송사는 개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경영난으로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넘어갔고, 그나마 1959년 2월에 화재로 인해 불타버려 그때 배정했던 ‘채널 9’를 정부가 거두어감으로써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때 걷어간 ‘채널 9’가 오늘날의 KBS-1TV가 되지만, 어쨌거나 HLKZ-TV는 한국최초로 텔레비전방송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바로 그 한국최초의 텔레비전방송인 HLKZ에서 최창봉이 보여준 역할과 열정은 그 후 생겨나는 여러 방송사의 경영과 프로그램제작의 발판 또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상태에서 방송 인력을 모아 프로그램을 만들어 송출했고, 편성과 제작기술의 토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최초의 TV드라마가 여기 이 방송에서 최창봉의 손에 의해 선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기자재도 불충분하고 스튜디오 여건도 열악하고, 녹화장비가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원시적 상황에서, 그야말로 선구자적인 열정으로 TV드라마 장르를 탄생시켰다. 의욕적인 최창봉이 직접 연출을 맡아 만든 한국최초의 텔레비전드라마는 외국작품 번안극인 15분짜리 드라마 ‘사형수’였다. 이로써 최창봉은 대한민국 텔레비전프로듀서 1호가 되었고, TV드라마 연출 1호라는 기록도 갖게 되었다. 적어도 3개 이상 방송사 개국의 주역 인재양성과 프로그램 개발 제작에 몰두 그로부터 2개월 후 그는 또 다시 외국작품 번안극 ‘천국의 문’을 만들어 한 시간 남짓 방송하는가 하면, 연이어 여성국극단의 창극을 스튜디오로 옮겨 재현하는 형식으로 유치진 원작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와 ‘조국’ 등의 작품을 드라마형식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외국작품 번안에서 국내 원작을 드라마로 만드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때 출연한 학생극회 소속 배우들 가운데 최상현, 이순재, 이낙훈, 오현경, 여운계 등이 훗날 한국TV드라마의 주요연기자들로 활약하게 된다. 최창봉의 방송인재 발굴은 이뿐만 아니었다. 드라마 연출에는 이기하, 황은진, 허 규 등을 끌어들였다. 그러다가 1961년 8월부터 그때까지의 민영과는 다른 새 국영TV방송국 설립을 위한 준비 작업이 정부주도로 진행되었고, 이때 최창봉은 MBC문화방송 창설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KBS-TV의 실무책임자로 발탁, 잠시 자리를 옮겨 임명된 것이다. 실무요원으로는 이미 HLKZ에서 경험을 가진 몇몇 연출자 외에 홍의연, 최덕수, 정일몽, 유인목 등을 합류시켰다. 모두 20대 아니면 30대 초반이었던 이들 실무진들은 최창봉을 정점으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여기서 최창봉의 리더십은 단연 돋보였다. 혹시 누가 게으름을 피우기라도 하면 쥐어박기도 했지만 저녁이 되면 술잔을 마주하고 화끈하게, 정감 있게 풀어버리는 스타일로 많은 방송요원들을 확보하고 거느리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한국방송계에 소위 ‘최창봉 사단’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새로운 국영TV, 즉 KBS-TV의 개국준비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역시 사람을 뽑는 일. 개국과 동시에 일할 사람으로 공개모집을 실시했는데, 그때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PD지망생 11명 가운데 훗날 TBC를 거쳐 KBS사장까지 지낸 홍두표와 KBS대구국장을 지낸 신윤생, 인기드라마 ‘여로’의 연출 겸 작가인 이남섭, TBC이사를 지낸 황정태 등이 들어 있었다. 방송과 사람을 아낀 전설적 방송인 특유의 보스기질에 리더십까지..... 이러한 인력확보의 중심에는 물론 늘 최창봉이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방송을 끌고 갈 주요인재들을 뽑고 길러내는 작업에서도 최창봉은 일종의 산파역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1961년 12월 31일 화려한 잔치와 함께 KBS-TV가 개국을 한다. 본격적인 TV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KBS텔레비전방송을 성공적으로 탄생시킨 최창봉은 정식기구가 만들어지기까지 몇 달 간 총책임자로 일하다가 이번에는 다시 DBS동아방송 개국에 참여한다. 여기서도 방송인원의 선발과 프로그램 기획, 편성, 제작의 총책임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하며 약 9년간 부사장 겸 방송총국장을 맡아 새로운 라디오프로그램 개발에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는 1971년에 KBS중앙방송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국영방송 KBS를 공영체제인 ‘한국방송공사’로 출범시키는 실로 중대한 업적을 이룬다. 그때가 1973년 3월이었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아 민간상업방송들과 차별화 하는 프로그램 제작에 매진한다. 그 결과 ‘춘향전’과 같은 한국고전시리즈를 드라마로 제작했고, 저 유명한 국민드라마 ‘여로’와 일종의 국책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등으로 당시 시청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는 KBS로 만들었다. 1989년 1월에는 MBC문화방송 사장으로 선임되어 약 1년간 재직함으로써 한국방송계를 두루 섭렵한 역사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다. 아마 PD출신의 방송사 사장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송계에 근무하면서 작가나 PD, 연기자와 기술진, 하다못해 방송사 경비원까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인물이었다. 한 인물이 국영방송과 공민영방송을 골고루 활동무대로 삼아 방송계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 경우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창봉은 끝까지 그를 따르는 많은 방송계 인사들의 추앙을 받으며 구순이 넘도록 한국방송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면서 살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방송과 TV드라마를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면서 최창봉을 맨 먼저 언급하게 되고, 결코 그를 제쳐놓거나 빼 놀 수 없는 이유라면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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