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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리얼리티와 인간본질의 추구” 김수현드라마 현상과 가치에 대하여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리얼리티와 인간본질의 추구” 김수현드라마 현상과 가치에 대하여
내용 문학잡지 ‘문학의 오늘’ 2021년 가을 호 특집
‘작가 김수현의 드라마세계’

“리얼리티와 인간본질의 추구”
김수현드라마 현상과 가치에 대하여

최근 ‘김수현드라마 전집’이 책으로 나왔다. 작가 김수현의 명품단막극과 연속극들 중에서 골라 모두 16권으로 묶은 것이다. 실로 방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텔레비전드라마의 경우 그동안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단행본 성격으로 출판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한 작가의 드라마들을 모아 전집으로 낸 적은 없었다. 이 전집 자체가 우리 문학의 또 다른 지평을 여는 길잡이나 기록으로 남기를 희망하면서 드라마의 신(神), 언어의 연금술사, 시청률제조기,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작가, 그의 드라마라면 죽은 시체도 벌떡 일어난다는 김수현작가의 드라마 현상과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TV드라마는 독자적 문예사조(文藝思潮)다

시나 소설, 연극이나 영화처럼 드라마 또한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 장르와는 달리 TV드라마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대중적 매체를 위해 창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문예사조라고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라고 할 만큼 영상이 중요시되지만 드라마는 오로지 작가가 쓴 극본대로 제작한다는 점에서 언어와 영상을 함께 동원하여 쓴 작가의 문학적 창작력이 우선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또 한편 시나 소설, 연극이나 영화가 자신이 선택한 작품을 특정장소에서, 특정소수를 대상으로 소비하는 문학의 영역이라면, 텔레비전드라마는 언제 어디서나, 아무나가 수용하는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소비대상의 문제는 소재나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 당연히 그 한계와 제약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드라마는 그 한계와 제약을 미덕으로 삼아 창작해야 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모든 문학이 다 그렇듯 드라마 역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끊임없이 인간을 들여다보고 언제나 인간본질의 추구, 그들이 살아가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학, 즉 드라마가 할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본질의 추구,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닌 황당무계한 판타지나 인간의 문제를 저버린 단순한 오락물은 모두가 방송용 드라마가 아닌 것이다. TV드라마들이 그 시제를 가급적 현재에 맞추고 있거나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다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수현드라마가 시청률 30%에서 70% 이상을 오가면서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의 드라마소비자들을 사로잡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혹자는 간혹 시청률을 무시하거나 시비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작품에 대한 모독이고 콤플렉스로 인한 조롱이며 편견일 뿐이다. 시청률 등의 소비행태나 반응은 결코 한 장르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을 써서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쓴 글에 감동하고 공감을 나누기를 바라는 속내가 있지 않은가. 드라마문학의 소비자라고 해서 저급하거나 바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시청률 30% 이상이면 우리의 경우 줄잡아 1천만 명 이상이 동시에 본다는 계산이다. 일정기간 누적된 숫자가 아니라 단한 번 동시에 보는 숫자이며 엄청난 폭발력이다. 좋든 싫든 김수현드라마는 지난 50여 년간 한국을 지배한 문화 권력이었다. 한국인 대부분이 굶주렸던 문학적 정서나 갈증을 바야흐로 등장한 김수현드라마에서 풀고 있었다 해도 크게 틀리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모두 흑백TV시절 김수현드라마의 출현으로 이뤄진 시대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독자적 문예사조인 TV드라마가 불특정다수의 대중에게 서비스한 문화적 선물이기도 하다.
흑백TV시절에 이미 새로운 드라마의 역사를 쓰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1960년대 말 라디오드라마 공모당선작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후1970년대 초 ‘무지개’라는 텔레비전주간 극을 쓰다가 당시 TV주력프로그램으로 떠오른 일일연속극 작가로 전격 발탁되면서 시작되었다. 정확히 1972년 8월 30일에 방송을 시작한 MBC-TV의 일일연속극 ‘새엄마’가 그것이다. 그때는 이미 TBC-TV의 ‘아씨’나 KBS-TV의 ‘아버지와 아들’ ‘여로’ 등이 이른바 전대미문의 국민드라마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MBC는 시급히 대안을 내놔야 했고, 그래서 과감하게 들고 나온 일종의 모험카드가 거의 드라마신인이다시피 했던 김수현이라는 작가였다. 밤마다 사람들이 온통 TV앞에 몰려들 정도로 인기였던 ‘아씨’나 ‘여로’와 같은 국민드라마들은 모두 하나같이 일제와 해방과 육이오를 거치면서 어렵게 살았던 지나간 시절의 여인수난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거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매일 밤 이들 연속극들을 보면서 눈물깨나 흘렸기에 최루탄드라마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속에서 김수현의 드라마 ‘새엄마’가 나온 것이다. 한 대가족 집안에 재취로 들어온 여인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 무렵만 해도 재혼녀에 대한 편견과 이질감이 남아있던 때였고, 전처소생의 자식들과 새엄마와의 관계가 심히 불편한 경우가 많던 시절이었다. 위로는 만만찮은 시어머니가 있었고, 이미 장성해 결혼까지 하고도 한 집에 사는 전처소생의 자식들까지 있었다. 앞으로 이 여인이 이 집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관심거리였다. 그런데 이 여인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지혜롭게 처신하며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의지로 아름답고 편안한 가정을 꾸려 나간다. 불행한 여자의 행복이랄까. 예측을 완전 뒤집는 전개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과거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가 결코 아닌 현실과 일상을 부각시킨 일일극, 가족을 기본단위로 하면서 절대로 울지 않는 여인의 이야기, 그저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일상의 생활을 마치 일기처럼 엮어가며 인간본질을 들여다보려는 이야기...그것은 분명 그때까지 있었던 여타 드라마와의 차별이고 새로운 시도였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김수현의 가족드라마에 나오는 가족은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위계질서 속에 각자 자유와 개성을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구성원이 갈등보다는 상호이해와 진심 어린 배려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삶의 방식과 인식의 전환을 가족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그려가려는 새로운 관점이 등장한 것이다. TV매체의 기능과 부합되는 새로운 생활드라마, 새로운 가족드라마가 탄생한 셈이다. 그리하여 이 ‘새엄마’는 일약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이듬해인 1973년 연말까지 무려 411회나 방송된다. 당시로서는 가장 긴 최장수 연속극이었다. TV드라마의 한 전형(典型)을 완성시키는 새 역사를 써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현실과, 사람 살아가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김수현드라마의 리얼리티에 홀렸고, 줄기차게 인간의 본질을 추구해보려는 김수현드라마의 끈질긴 시도에 모두가 빠져들었다. 주고받는 대사 또한 그때까지의 드라마들과 사뭇 다르게 현실감각이 살아있고 실감나고 싱싱한 생활언어들이었다. 비로소 사람들의 말문을 트이게 하는 역할까지 해냈다. 펄떡이는 생선처럼 살아 움직이는 생활언어로, 인간의 자존감과 의지와 아름다움을 실로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내보이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상생활드라마로서의 가족단위 ‘김수현표’ 일일연속극은 그 후 무려 7년 가까이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진다. 드라마를 쓴 극본의 원고분량이나 작업에 매달린 시간으로 보면 가히 초인적인 일이었다. 그때부터 텔레비전드라마가 굳이 퇴영적 과거사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가능하게 되었다. TV드라마의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확실하게 뿌리내렸다.
선명한 주제로 ‘마음’의 움직임을 그려가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긍정의 마인드다. 어둡고 음습하지 않고 대체로 밝고 따뜻하다. 작가 자신이 인간을, 인생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이리라. 어떤 경우에도 절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찰 즉 인간 들여다보기에서 얻어진 결론이기도 할 테고,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인간들을,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필사적으로 들여다 본 결과로 나타난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연구내공이 깊고 풍부하다는 것을 드라마의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세상과 인간을 끊임없이 들여다 본 데서 얻은 드라마의 밑천들이 그의 창고에 이미 가득 차 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서의 진정성과 날카로움과 번득이는 재능이 드라마마다에서 빛난다. 급기야 모든 드라마의 주제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하고 작품의 개요 또한 쉽고 명쾌하게 정리해버린다. 집필의도를 나타내는 한 줄짜리의 이른바 ‘로그라인’에 있어서도 언제나 그 내용과 방향성이 뚜렷하다. 1970년대 이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일일연속극들에서부터 1980년대 컬러TV시대 이후의 주간 극에다 주로 2000년대를 전후해 감동을 안겨준 명품단막극까지, 김수현의 드라마는 작품마다 그 주제가 명확하고 작품개요가 간단명료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곧 작가가 작품마다 어느 쪽에 집중해서 일목요연하게 드라마를 몰아가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키워드가 되는 셈이다. 드라마마다 집요하고 치밀하고 또 치밀하게 쓴다는 자세를 나타내는 일종의 신호나 습관 같은 것이다. 예컨대 1970년대의 일일극 ‘신부일기’는 서울로 시집 온 똘똘한 시골색시가 어떻게 살아갈까 이었고, ‘강남가족’은 선량하고 정직한 공무원가장의 가정이 살아가는 이야기였으며, ‘여고동창생’은 친했던 여고동창생들의 세월과 변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여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시골에서 서울로 시집 온 새댁에 맞추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히 살아가는 향기로운 인생을 위해 늙은 세무공무원을 가장으로 등장시켰다. 일일극 ‘봄이 오는 소리’도 이하동문, 마찬가지였다. 뚜렷한 주제의식과 간단명료한 작품개요는 1980년대의 주간연속극에서도 그랬고,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단막극이나 멜로드라마에서도 그랬다. 김수현드라마의 사랑시리즈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진실’에서는 두 자매의 엇갈린 운명과 신분 바꿔치기였고, ‘사랑과 야먕’에서는 각기 다른 형제이야기이었으며, ‘산다는 것은’에서는 한 처녀가장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배반의 장미’에서는 십 여 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남편을 돌보는 젊은 아내의 마음의 행로를 그렸고, ‘작별’에서는 치명적인 질환으로 죽음을 앞둔 중년의사를 통해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와 아픔을 보여주는 경우였다. ‘은사시나무’는 이 세상에 외롭고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디로 가나’는 시아버지와의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사랑 찾기다. 한 결 같이 주제가 선명하고 스토리텔링과 작품개요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다만 깊이 있게 다룰 뿐이다. ‘부모님전 상서’는 조금만 옛날로 돌아가자 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전, 불과 얼마 전까지의 사는 방식과 정서가 훨씬 행복하고 인간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 드라마에선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등장인물 모두의 시간이나 생각이 조금은 예전 같은 고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명제의 산뜻함과 발상의 전환이 김수현드라마 전체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요란한 액션이나 행동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 흘러가느냐를 그리는데 치중하고 있다. 결코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 구조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도 한다.
‘철저한 리얼리티로 무장한 드라마

이른 아침, 서울의 어느 주택가 양옥집. 그 집의 가장(배우 김세윤)은 잠옷 차림으로 조심조심,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와 대문간에 가서 조간신문을 집어온다. 그리고는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놓고는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아내를 깨운다. 한편 또 다른 주택가 한옥 집에서는 역시 그 집의 가장(배우 이순재)이 마당에 서서 다짜고짜 안에다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각 방마다 온 식구들이 화들짝 놀라 깬다. 그리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군대조직의 졸병처럼 우왕좌왕 쩔쩔 맨다. 한 눈에 봐도 한쪽 집안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문화인데 반해, 다른 쪽 집안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며 거의 독재에 가까운 가풍이다. 1990년 11월 23일부터 1992년 5월 31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저녁에 방송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시작부분, 즉 도입부의 상황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집안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심상찮다. 이 상반된 문화의 두 집안의 자녀들이 서로 사귀귀도 하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 또는 낯설어하며 앞으로 사돈도 되고, 사사건건 부딪쳐가며 가치관 내지는 문화적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어간다. 두 집안의 아내들은 알고 보면 여학교 때 동기동창 관계다.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유쾌한 대조를 그냥 내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웠다. 평균 시청률 70%를 웃도는 의도하지 않은 ‘블록버스터’로 김수현드라마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시청률 70% 이상이면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매번 이 드라마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현실과 생활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장장 일 년하고도 6개월이 넘도록 경쾌하게 펼쳐졌다.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각기 다른 문화를 서로 존중하며 인정하는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까지 김수현의 주말 또는 일일연속극에서 가끔 보여주었던 코믹터치가 그 절정을 이루면서,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주말 저녁 8시 시간대는 남의 집에 전화하는 것조차 실례라고 할 정도로 온 국민이 이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른바 ‘김수현신드롬’의 패닉현상 종결 판 양상을 다시 불러일으켜주었다. 1980년대 컬러TV시대 이후 김수현드라마는 종전 흑백시대의 일일연속극에서 주말연속극으로 종목을 바꾸었는데, 오히려 매일 나가던 일일극 못지않게 더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시청자들이 김수현드라마에 질질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되었고, 이와 같은 현상은 이후 1990년대와 2010년대까지 이어졌다.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배반의 장미’ ‘청춘의 덫’(리메이크) ‘내남자의 여자’ 등의 멜로드라마까지, 주간연속극 시대를 완전 평정한 또 한 번의 김수현드라마 전성시대였다. ‘사랑이 뭐길래’는 최초의 한류드라마다. 한국드라마로는 처음으로 외국(중국)에 수출되어 중국대륙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김수현드라마는 재미있다. 그 재미의 비법은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리얼리티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본질을 추구하는 김수현드라마는 리얼리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허구는 가라’고 외치고 있다. 드라마란 것이 기본적으로 지어내는 픽션 임에도 김수현의 드라마는 순 엉터리로 지어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철저히 거부한다. 리얼리티가 없는 드라마는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리얼리티가 곧 TV드라마의 특성이고 숙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드라마란 영상 이전에 언어문학이고 기본적으로 대사극(臺詞劇)이다. 그래서 대사를 살린다. 단순히 말이 많다거나 말의 성찬이라서 그의 대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항상 적재적소에 적확한 말, 스토리의 전개방향으로 나가는 말, 인물들의 캐릭터와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들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 쉽고 담백한 주제와 한군데로만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고, 빙빙 들러대지 않고 바로 부딪치는 극적 묘미가 있다.
김수현 표 멜로드라마의 정서적 특성

인생을 날로 먹자고 덤비는 신데렐라 증후군의 인물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재벌 2세 부류 등은 모두 골이 빈 망나니들처럼 그린다든지, 결손가정의 자녀는 대체로 불량 비행(非行)청소년뿐인 것처럼 선입견을 만들어버린다든지, 전혀 리얼리티가 없는 엉터리 수박 겉핥기로 인물을 그려내는 드라마는 증오한다. 그 본질에 대해 책임질 생각 없이 대부분 지어내는 허구나 망상의 현실은 철저히 배격한다. 마치 그 인물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쩌면 그리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을까. 하다못해 가정부 급 역할이나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저 구석의 조연까지 모든 인물을 살린다. 등장인물, 즉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제구실을 하게 만든다.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고 아주 절묘한 균형과 대조를 이룬다. 가령 ‘사랑이 뭐길래’에서 객식구로 와있는 이모할머니들이 한 사람은 기독교신자로 ‘주님’하고 기도하면, 한 사람은 불교신자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다. 리얼리티가 없는 황당한 판타지나 있을 수도 없는 가상의 상황, 드라마를 위해 마구 날조한 인간 아닌 괴물들이 판치는 드라마는 단 한편도 쓰지 않았다. 바로 이런 요소와 노력들이 김수현드라마로 하여금 항상 탁월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김수현드라마는 리얼리티의 재미다. 김수현 표 멜로드라마도 그래서 재미있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애정문제를 그리면서도 철저한 리얼리티의 정서를 깔고 있어서 김수현의 애정 극들이 더욱 재미를 더한다. 리메이크된 ‘청춘의 덫’을 위시해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내 남자의 여자’ ‘불꽃’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완전한 사랑’과 ‘천일의 약속’이 그렇다. 가장 가까이서 믿었던 친구가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상대가 시한부 생명으로 꺼져가지만 지고지순한 애정으로 끝까지 함께한다거나, 기억을 잃어가는 연인을 사랑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이야기 등에서 김수현멜로드라마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건 결코 지어낸 가짜가 아니었다. 꾸며내고 지어낸 허구로 점점 팩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팩트에 더 가까워지려고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꾸미고 이어간다. 애정윤리도 철저한 리얼리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김수현의 멜로드라마는 순전히 애정행각에만 매달리는 멜로물이 아니다. 항상 그 기조는 가정에 바탕을 두거나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 그냥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대부분 홈드라마에다 멜로를 합친 ‘홈 멜로물’이다. 이 점에서 또한 김수현 멜로드라마는 때로는 실감나고 때로는 심금을 울리는 가슴 아픈 묘미가 있어서 여타의 숱한 멜로드라마과 차별화 된다. 여느 김수현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로 멜로를 다루는 것이지 앞 뒤 거두절미하고 오로지 애정만으로 내달리는 황당함 따위는 없다. 그래서 더욱 김수현의 멜로드라마들이 드라마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사람들이 김수현의 멜로드라마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여기서도 어김없이 차가운 현실감각으로 무장한 리얼리티를 앞세워 인간본질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김수현의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상황설정이나 감각적이고 생생한 언어, 직선적이고 솔직한 감정처리와 애정윤리가 재미를 준 부분도 없지는 않겠으나, 그 바탕에는 언제나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정서의 현실성과 리얼리티가 있었다. “당신, 부숴버릴 거야” 대표적인 멜로물인 ‘청춘의 덫’에서 나온 이 한 마디가 두고두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잘 요약된 감정의 압축이 언어로 와닿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아마도 더 많은 소비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않았을까. 이리하여 멜로물도 역시 황당하거나 천박하지 않고 품격을 유지하는 명품들이 되었다. 수많은 당대 시청자들의 압도적인 호응을 얻은 것도 멜로에서까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정서적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족관계 해석과 가족의 개념부터 달랐다

김수현의 가족드라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선 이미 명확한 해답이 드라마로 나와 있다. 1990년대 이후 2000년대 초중반 사이에 김수현은 이른바 ‘가족드라마 4종 세트’라 불리는 일련의 괄목할만한 가족드라마들을 연이어 내놓는다. 먼저 1995년 11월에 방송을 시작해 모두 83회까지 주말연속극으로 시청률 고공행진을 한 ‘목욕탕 집 남자들’이 있다. 서울 쌍문동에서 대대로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는 한 건물에 대가족이 모여 살면서, 때로는 가족끼리 다투고 화해하고 일을 벌이기도 하고 마무리하기도 하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중년 이후 주부의 자아 찾기와 반란이 가출휴가요구로 받아들여지는 ‘엄마가 뿔났다’와, 경기도 여주를 무대로 조금은 덜 각박했던 옛 시절로 돌아갔으면 한 ‘부모님전 상서’와, 가장 늦게 나온 ‘무자식 상팔자’가 이른바 김수현의 ‘가족드라마 4종 세트’다. 여기서 ‘목욕탕 집 남자들’ 대신에 제주도를 무대로 한 ‘인생은 아름다워’를 끼워 넣는 사람들도 있다. 한 결 같이 가정이 그냥 배타적인 사적 집단이 아니라 포용적 공간과 사회의 한 축소판으로 나타나며 가정이 중심이지만 대체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쏟아내 놓는다. 돌이켜보면 김수현의 가족드라마는 1970년대 흑백TV시절부터 대가족 중심이었다. 한 집안 안에서 우르르 모여 마루식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밥도 먹고 아옹다옹 살아가느라 바쁜 나날들의 이야기가 주류인 셈이었다. 그러다가 아파트에 핵가족에 분가형태로 주거방식이 바뀌고 가옥구조가 달라지면서 1970년대 이전 식의 대가족 중심은 상당한 변화를 맞이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끼리 뭉쳐 사는 대가족 개념의 김수현가족드라마의 구성자체가 완전히 해체되는 것은 아니었다. 종전에 한 집안에 몰려 살던 식에서 발전해 한 동네 또는 이웃에 각자 독립된 주택에서 살면서 그 유대관계는 대가족 그대로를 유지하는 식이었다. 이웃과 동네에 흩어져 살면서 마치 한 집안처럼 자주 왕래하고 관심 갖고, 일테면 공간적으로 변형된 형태를 취할 뿐 김수현 식 가족 간 거리와 가족애는 지속된다. 툭하면 달려오고 툭하면 불려오고, 우르르 몰려와 밥을 먹거나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간다. 김수현의 가족드라마에서의 먹는 것, 즉 ‘밥’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밥이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대체로 신경도 쓰지 않지만 김수현의 가족드라마에서는 언제나 중요한 행사로 다뤄지고 있다. 인간이 산다는 것에 있어서 따지고 보면 먹는 것만큼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것도 없다. 하지만 다들 아주 평범한 이런 진리를 그저 모른 체 무심하게 지낼 뿐이다. 김수현의 가족드라마에서는 다르다. 결코 이런 부분을 놓치지 않고 충분히 반영한 채로 드라마를 진행한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대로 기본적으로 그 중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스타일이다. 이것 역시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일례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 무시하고 지나가는 리얼리티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때라도 밥 먹는 행사는 그저 아무 의미 없이 행하는 설정이 아니다. 반드시 극적 진행에 필수적인 단서를 제공하면서 다음으로 이어지기 위한 상황의 진전을 위해 밥을 먹는다. 으레 마루에 큰 탁자 하나 놓고 빙 둘러앉아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이나 주고받으면서 그냥 밥 먹는 장면을 남발하거나, 이 방 저 방 몰려다니면서 말장난이나 하는 예컨대 좌담회식 드라마는 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김수현가족드라마의 차이는 가족관계와 가족의 개념과 가족의 정의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김수현가족드라마에는 가족이 단순한 혈족이나 혼인관계, 혈연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때로 오갈 데 없는 객식구도 가족으로 받아들여 당당하게 가족의 일원으로 행세하며 살아가거나, 때로는 사회적 약자나 하다못해 가정부라도 한 가족으로 얽혀 살아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때로는 몸이나 정신이 좀 불편하거나 지적인 능력이 좀 떨어지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도 가족으로 거둬들여 함께 산다. 재혼가정의 배다른 형제자매도 아무 탈 없이 어울려 살고, 심지어 형편이 딱해 잠시 머무는 사람도 있다. ‘사랑과 야망’에서는 오갈 데 없는 여인이 둘씩이나 진정한 가족대접을 받으며 어울려 산다. 한마디로 배타적 가족관계가 포용적 인간관계로 나타난다. 가족의 개념이 다르다. 가족이 곧 하나의 사회로 존재하며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언제든지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동시대인간들의 공통의 문제로 다뤄지게 된다. 퇴직한 가장의 문제, 미혼모가 된 딸의 문제, 노인 가족 세대의 문제,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와의 갈등, 비혼(非婚)과 거듭되는 이혼과 가족 간의 연민이 뒤엉켜 돌아간다. 가족관계가 다르고 가족의 개념을 달리한다. 하나의 인간 공동체로서 가족의 관계와 개념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수현가족드라마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김수현드라마에는 인문학(人文學)이 있다

김수현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일일극, 주말연속극, 미니시리즈 등의 주간 극에서 고루 나왔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그 메시지의 감동적 측면에서는 주로 특집극 형태로 방송된 명품단막극들을 빼 놀 수 없다. 3부작 단막극을 하루 저녁에 몰아서 편성하는 예를 만든 ‘어디로 가나’를 비롯해 ‘은사시나무’와 ‘홍소장의 가을’과 ‘인생’과, ‘아들아 너는 아느냐’ ‘혼수’ ‘아버지가 미안하다’ 등이 있다. 이들 단막극들은 거의 대부분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저시게 만들었고, 다들 스스로를 돌아보느라 잠을 설치게도 만들었다.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생의 순간에서 지난날 살아온 모두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시청미화원으로 열심히 살아온 아버지가 결국은 자녀들의 앞길에 장애요소가 되는 서글픈 세상이야기도 있었다. 명예퇴직으로 직장에서 밀려난 것도 모자라 가정에서까지 홀대받는 처지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가슴 먹먹하게 살아가는 현실이야기 등등. 특히 김수현의 단막극들은 우리가 왜 사는가를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드라마들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들, 아프거나 기쁘거나 슬픈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본질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함축성 있게 그려진 김수현의 단막극들이었다. 이 세상에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든지, 옷도 나이를 먹는다든지 하는 요컨대 진리에 가까운 말들로 일깨워주면서 때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소박한 일생의 디테일을 통해 우매하기도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와 아름다움까지 한편의 단막극에 담아보려 했다. 사람의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인간은 무엇이며 인생은 또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라서 사람들은 그동안 김수현의 드라마를 늘 주의 깊게 보아왔다. 드라마는 꿈이요 거울이요 창(窓)이란 말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때로는 인간에 대한 날카로움으로, 때로는 리얼리티로, 인간본질과 산다는 것의 엄혹함을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보여주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수현의 드라마에는 철학이 있고 심리학이 있고 어문학이 있고 논리학이 있다. 그리고 사회학이 있고 인문학이 있다. 모두가 다 있다. 세상만사 천태만상, 각양각색의 인간드라마와 생활풍속과 실로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에 천착해왔다. 지어내고 꾸며대는 허구의 거짓말이 아닌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진정성에로의 관심이 한편 한편의 드라마에 언제나 돋보였다.

신 상 일 (방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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