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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드라마아트홀

Kim Soo Hyun Drama Art Hall

TV드라마 인문학(71)-역사와 인간문제를 파고든 인문주의 작가, 작가 이은성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비밀번호 정보 제공
TV드라마 인문학(71)-역사와 인간문제를 파고든 인문주의 작가, 작가 이은성
내용 <드라마작가 이은성>

작가연보

1937년 경북 예천 출생(유년시절 대부분은 일본에서 보냄)
1966년 당시 공보처 주최 시나리오 공모에서 ‘칼 맑스의 제자들’로 당선
그 무렵 철도청 철로보선 반원으로 근무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녹슨 선(線)’ 당선
1972년 TV드라마 ‘대원군’(MBC) (이하 대부분 TV역사극 집필)
1973년 ‘명인백선’ ‘세종대왕’(KBS)
1974년 ‘강감찬’(KBS-TV)
1975년 ‘충의’(KBS-TV)
1976년 ‘예성강’ ‘집녑’
1977년 ‘거상 임상옥’ ‘해룡, 뭍에서 바다로’
1978년 ‘소나기’
1979년 땅과 하늘 사이‘(TBC-TV)
1980년 ‘의친왕’
1981년 ‘등신불’
1983년 ‘광대가’ ‘고산자 김정호’
1984년 ‘토정 이지함’ ‘동리 신재효’ ‘개국’
1985년 ‘정선 아라리’
1986년 ‘여심’(KBS-TV, 유일한 현대물)
1988년 1월 30일 서울올림픽 기념특집극 ‘아리랑’ 집필 중 별세(향년 54세)
1990년 잡지에서 연재하던 ‘소설 동의보감’을 미완인 채 상중하 세권의 책으로 출간,
당대의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됨.
(이밖에 ‘명인 얼어붙은 바다’ ‘인간의 벽’ ‘달아달아 밝은 달아’ ‘독짓는 늙은이’ ‘소 망’ ‘행복의 문’ ‘사랑하는 사람들, 등의 단막극과 각색물이 있음)



늘 원고에 쫓기며 피해 다니기 바빴던 작가

1980년대 초반 어느 초겨울 날의 새벽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날이 밝으려면 아직은 이른 듯, 뿌옇게 밝아오는 고속버스터미널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으스스한 분위기에 조금은 춥게 느껴질 만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웬 꾸부정한 사나이가 두리번두리번 자기가 탈 버스의 행선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머리엔 모자를 눌러쓰고 손에는 간단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윽고 그 사나이가 터미널 벽에 놓인 벤치 근처에 왔을 때, 거기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나이가 눈에 띠었다. 그 역시 모자를 눌러쓰고 간단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사나이가 점점 벤치 가까이로 가자 먼저 와서 의자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중년의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그것도 마치 상습범처럼 아주 천연덕스럽게.
“도망자요?” “아니 이형! 이형도 도망자요?”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마주보며 씩 웃었다.
자기가 탈 차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사람은 눈이 좀 안 좋은 사극작가 임 충(林忠)이었고, 먼저 와서 의자에 앉아 “도망자요?” 하고 물은 사람은 유난히 덩치가 큰 편인 작가 이은성(李恩成)이었다. 두 사람 다 텔레비전에서 주로 역사극을 많이 쓰고 있던 사람들로, 작가 이은성은 소위 문예물이라 불리는 ‘TV문학관’과 같은 주목할 만한 TV드라마나 작품성이 강한 단막극을 누구보다 많이 써온 작가였다. 둘 다 한창 열심히 드라마를 써내고 있던 당시로선 아주 바쁜 작가들이었다. 근데 그들이 이 신 새벽에 고속버스터미널에 웬일들로 홀연히 봇짐을 들고 나타났단 말인가. 보아하니 미리 약속한 것 같지는 않고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데.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도망자들이었다.
그 무렵 한 TV방송사에서 들여온 ‘도망자’라는 외화가 인기리에 방송되면서 유난히 ‘도망자’란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행하던 때였다. 물론 그 도망자하고는 다르지만 방송사에 써줘야 할 드라마 원고를 제때 못 써서 어디론가 도망을 치는 신세였다. 전화연락도 끊고 아무도 못 찾을 곳으로 가서 어쩌든지 작품을 써서 나타날 요량으로 이 새벽에 정처 없이 버스를 타고 각자 행선지를 정해 떠나려던 참이었다. 말하자면 둘 다 비슷한 처지로 새벽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는 각자 제 갈 길을 정해 다른 행선지로 떠났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방송은 시간싸움이지만 제 시간에 원고를 못 댈 때도 더러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도망자! 그의 이름은 원고 늦은 드라마작가들

시간을 다투는 드라마원고를 쓰지 못해서 도망을 다니고, 펑크 내기 직전에야 간신히 원고를 들고 나타난 적이 비일비재했던 이들이라, 그들 사이에 ‘도망자’란 용어는 이미 일반화 되어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 마디로 “도망자요?” 했을 때, “이형도 도망자요?”라고 한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방송에서는 원고가 늦었을 때 어디론가 도망쳐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항상 초조와 긴장과 쫒기는 기분 속에 드라마를 썼다. 특히 작가 이은성은 평소 파지(破紙)를 많이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쓸 때마다 드라마를 한 번에 써내지 못하고 2백자 원고지 매 페이지마다 몇 번이고 고쳐 쓰고, 그때마다 잘 못 써진 원고지는 구겨버리는 습관으로 쓰레기통은 언제나 수북했다. 웬만하면 지우고 그 위에다 쓰면 될 텐데 그는 그걸 용납 못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이 쓴 원고지 위에 고쳐 쓴 흔적을 남기거나 잘못 된 글자가 있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여러 가지 색깔 있는 색연필로 아주 다채롭게 쓰기까지 해서 어떨 땐 원고지가 총천연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건 그냥 재미가 아니었다. 본인으로서는 꽤나 진지하게 그 작업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왜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렸는가는 차차 알아볼 일이다. 어쨌거나 원고를 쓰는 작업과정이 이러니 물리적으로도 탈고가 늦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원고가 빨리 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가 원고를 늦게 써서 사실상 펑크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그만큼 힘들게 썼을 뿐이다. 누구는 작가 이은성이 원고 쓰는 걸 지켜보고는 마치 탱크가 굴러가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 작지 않은 체구에 굵은 손가락으로 누구보다도 힘을 쏟아 드라마를 써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게 써낸 작품이 늘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후반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는 적어도 TV사극에 있어서는 작가 이은성의 전성시대였다. 도망을 다니면서도 쉬지 않고 썼고, 주로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었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그는 제도권교육을 받지 않은 무 학력자라고 한다. 그것은 겉으로는 적어도 작가로서의 그의 활동에 아무런 장애요인이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으로는 달랐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그와 술자리를 같이한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그 대신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파고들었다. 누구보다도 광범위하고 많은 역사에 관한 실력의 깊이를 갖췄다. 작가가 되기 전 그의 직업인 철로보선이란 한 마디로 기차선로를 고치는 일이다. 그 일을 하면서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끝내는 한 시절 그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치열한 몸부림으로 인간본질을 파고들다

작가 이은성의 드라마들, 주로 사극의 범주에 속하는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이른바 궁중사극도 있었지만 야사나 민중사극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도 적지 않았다. 그 이전의 사극이라면 대체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은성의 사극에 와서야 비로소 궁중 밖의 민초나 일반 백성들의 삶을 파고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궁중이 주 무대가 되는 궁중사극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기록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드라마를 쓰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드라마에 있어서 그는 사람중심의 인문주의자였고 치열한 몸부림으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드라마라는 작가의식 때문이었다. ‘대원군’ ‘세종대왕’ ‘강감찬’을 비롯하여 국악을 다룬 ‘동리 신재효’ 등에서 쉽게 나타난다. 어떤 역사적 흐름이나 사건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오로지 사람을 다루면서 인간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드라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이 어떤 모습이며, 그들이 사는 삶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보려는 작가로서의 기본적 욕구에서 이은성의 역사극을 그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은성의 사극은 결코 궁중사극에 머물지 않고 가능하면 밖으로 나돌면서 인간을 찾아 헤맸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궁중중심에서 역사극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그 결과 궁중을 벗어난 민중사극의 대표적인 경우가 ‘거상 임상옥’이었다. 천민계급의 하나인 상인의 길, 즉 상도(商道)를 다룬 것이다. 사람을 다룬 것이다. 드라마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본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란 존재들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 인간의 모습을 파고드는 그런 이야기를 썼다. 원래 ‘임상옥’은 거상이 아니었다. 어느 상단의 말단으로 들어가 열심히 장사하고 차츰 인간을 연구하고 배워나간다. 그러다가 그가 인간을 꿰뚫어 보는 결정적인 순간, 그의 상업적 도의라고 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를 맞이한다. 당시 가장 인기품목인 고려인삼, 개성인삼을 갖고 장사를 나서는데 중국 상인들은 값을 후려치려고 온갖 수작을 다 부린다. 이때 임상옥이 과감하게 내민 카드가 가지고 간 인삼을 장바닥에 쌓아놓고 불태우는 퍼포먼스였다. 누구도 할 수 없는 두둑한 배짱으로 스스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한다.
설마, 설마 했지만 실제로 인삼은 불에 타고 있었다. 여기서 농간을 부리던 중국 상인들은 그만 손을 들고 불에 탄 인삼들을 보상하고도 남는 훨씬 비싼 값으로 나머지 인삼들을 사간다. 순간 장사의 신(神)이 탄생한 것이다. 고도의 위기전술로 승부를 건 것이 통했다.
남의 집 말단 심부름꾼으로 들어와 차츰 상인의 이력을 쌓아가던 임상옥이 일약 거상의 재목으로 꿈을 이뤄간다. 궁중사극이 아닌 민중사극의 가능성을 내보인 것이다. 드라마란 어떤 경우에도 오직 인간본질의 추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은성의 작가정신이 드러나고 있었다. 지도제작 하나에 목매달고 전국을 누비며 온갖 고초를 감수하는 ‘고산자 김정호’도 그랬다. 모두가 천시하는 우리 국악을 정리하고 꽃피우는데 일생을 바친 ‘동리 신재효’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고 인간본질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을 흔들지 않으면 모두 가짜라고 했던가. 그는 항상 진실 또는 진짜만을 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편이었다.
궁중사극 일변도에서 민중사극으로 지평을 넓히다

그의 덩치가 좀 크다고 대범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가였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새벽에 고속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도망을 가야 하는 작가 이은성을 어떻게 대범하다거나 강하다거나 혹은 독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누구보다 좋은 작품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가며 그야말로 검투사처럼 드라마 하나하나를 썼을 뿐이다. 스스로 자신의 학력을 ‘무학(無學)’이라고 쓸 정도로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는 그로 하여금 정규학교를 나온 사람 못지않게 역사와 문학을 섭렵하게 만들었고 작가로서의 의지를 벌겋게 달구어 1966년 당시 공보처가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에 ‘칼 마르크스의 제자들’을 떳떳하게 당선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역시 시나리오 부문에서 ‘녹슨 선(線)’으로 당선된다. 철로보선반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많은 이별과 만남을 보았을 것이고 그들을 싣고 오가는 열차들을 또 얼마나 보내고 맞아야했을까. 폭염과 혹한 속에서 철길을 응급복구하며 산다는 것의 쓴맛을 몸으로 체득하지 않았을까. 작품이란 언제나 이를 악물고 피맺힌 절규처럼 써야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결코 헛소리는 쓰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으리라.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선 그것이 시나리오든 드라마든 절대로 가볍게 쓰지 않으리라는 작가로서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은성은 단막극이든 연속물이든 늘 끙끙대며 힘들게 썼다. 데뷔는 시나리오로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훨씬 많은 드라마적 요소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주로 영상과 액션과 사건에 의존하는 영화보다, 영상 못지않게 마음과 생각의 변화와 대사의 비중도 중요시 되는 TV드라마의 특징과 매력을 파고드는 일을 결코 등한히 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는 ‘KBS무대’를 위시해 TV단막극의 전성시대였다. 이때 이은성은 수많은 TV단막극들을 썼다. 그중에는 선우휘의 소설 ‘단독강화’와 같은 각색 물도 있었지만 오리지널 단막극도 적지 않게 내놓았다. 이것이 곧 이은성의 드라마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가는 경험이며 내공이 되기도 했고, 이 시기야말로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주목받는 TV드라마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소중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많은 단막극 끝에 1972년 드디어 MBC-TV에서 연속극 ‘대원군’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실존인물의 삶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갖기 시작한다. 그 후로 줄곧 쓰게 된 KBS-TV의 ‘명인백선’ ‘세종대왕’ ‘강감찬’ ‘충의’ 등의 드라마가 단순한 역사극을 떠나 인물들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오로지 인간본질의 추구에 천착하려는 작가 이은성이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 나온 TV사극 가운데 이은성의 ‘세종대왕’은 그 후 여러 차례 방송되는 세종대왕 TV드라마콘텐츠의 일종의 교본 적 역할을 하게 된다. 동일한 역사적 소재는 여러 차례 TV사극으로 소개되기 마련이지만, 그 가운데서 이은성의 ‘세종대왕’은 그 주제나 역사적 인물의 해석에 있어서 제2, 제3의 세종대왕 드라마의 방향타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면 이은성의 역사극에는 흔히 역사극에서 자주 써먹는 ‘장희빈’이나 ‘장록수’와 같은 여자이야기는 없었다. 대부분 남성의 이야기였다. 역사물을 가장한 사극 적 멜로드라마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작가였다고나 할까. 왕이 주인공이 된 경우도 세종대왕 말고는 없었다. 그 대신 상인이나 장군, 그 시대의 장인 또는 명인 반열에 속하는 인간중심으로 관심을 돌렸다. 천민계급의 무지랭이들이나 민중계통의 인물들에 초점이 맞춰진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그때까지의 궁중사극 일변도에서 민중사극으로 관심을 돌리거나 사극의 지평을 넓히는데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불후의 창작드라마 ‘허 준’의 원작 탄생

누군가 작가 이은성에 대한 회고에서 이렇게 썼다. 작가 이은성은 심장으로 글을 썼다고. 마치 탱크가 굴러가듯 쿵쿵 힘찬 소리를 내며 심장으로 글을 썼다고. 그는 결코 손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얄팍한 재주로 글을 쓰지 않았다. “항상 심장으로 들이댔고, 그래서 작품기획부터 심장을 들이대야 성립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선 작가 이은성은 이른바 육척거구다. 틀림없이 철도보선반에서 일했을 것 같은 막노동꾼의 덩치다. 그 덩치가 방송사 작가실의 작은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고 있는 뒷모습을 보면, 책상 앞에 앉았다기보다는 마치 책상을 끌어안고 있는 듯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작품에 대한 확신과 고집 또한 거대한 바위와도 같았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은성의 작품을 멋대로 수정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토씨 하나라 할지라도 허락받지 않고는 어림도 없었다. 이런 고집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평소 그의 작업, 즉 글 쓰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남들은 정해진 분량 채우기에 급급할 때가 대부분인데, 작가 이은성은 정해진 매수보다 항상 넘치게 쓰고는 거꾸로 압축해나가는 식이다. 그만큼 항상 쓸 것이 많고 욕심이 많았다고나 할까. 대부분 철철 넘치게 쓰고는 색연필로 지워나간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안 들어 거의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쓸 때도 수없이 있었다. 조금도 아까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술은 당시 방송사들이 몰려 있던 여의도에서 여럿이 어울려 마시기보다는 뚝 떨어진 집 근처나 신촌쯤에서 한 두 사람끼리 조용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그러고는 안주로 족발을 시켜 그 두툼한 손으로 잡고 마구 뜯는다. 아주 맛있게 잘 먹는다. 어쩌다 노래 부르는 술자리에선 그의 애창곡 ‘한오백년’을 불렀다. 구구절절 한이 맺혀 가슴을 치는 창법이다. 무슨 한이 그토록 절실하게 맺혔을까. 미련과 고집으로 지키려 한 작가정신이랄까.
아마도 대쪽같이 살아온 자신의 작가관이나 작가정신을 지키기 어려워서 맺힌 한(恨)일 거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1976년 드디어 MBC-TV에서 ‘집념’이란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다. 그 바로 직전에 같은 MBC에서 ‘예성강’이란 드라마를 내보내고 곧바로 시작한 드라마가 ‘집념’이었다. 그러니까 이 ‘집념’이란 드라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막극도 아닌 연속극으로 그것도 금방 후다닥 써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드라마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방(韓方)에 대해, 한의학(韓醫學)에 대해 잘 몰랐다. 설사 관심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어떻게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자신이 없고 회의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은성은 자신만만했다. 조선시대 임금의 주치의 어의(御醫) 출신으로 한의학의 교본 ‘동의보감’을 쓴 ‘허 준’의 일대기! 한의학도 한의학이지만 그 인물의 생애를 필생의 역작으로 남길 준비가 돼 있었다. 전문적인 의학용어나 약재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고, 그보다는 한 인간의 시련과 가치를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이미 복안이 서 있었다. 그렇다고 ‘허 준’에 대한 기록이나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의원(醫員)이 있어 나중에 어의가 되고 우리 고유의 한의학 서적인 ‘동의보감’을 남겼노라 정도의 극히 짧은 기록 밖에 찾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작가의 몫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히 한의학이나 약재가 아닌 그의 생애부분은 고스란히 작가가 창작해내야 할 부분이었다. 작가 이은성은 그야말로 집념을 가지고 이 최초의 한의학드라마, 위대한 의학정신을 가진 한의사 허 준에 매달렸다. ‘집념’이란 드라마가 처음 나갔을 때 사람들은 우선 새롭고 전문적인 소재에 놀랐고, 그 속에 나오는 해박한 한의학의 세계에 관심이 높았다.
그리고는 주인공인 허준의 캐릭터에 빠져들면서 완벽한 극적 구성에 숨을 숨을 죽였다.
‘’허준 이야기‘ 한편으로 창작사극의 길을 열다

그때까지 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이 드라마가 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였다. 조선왕조실록 안에 불과 몇 줄에 지나지 않는 지극히 간략한 기록을 근거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실이 최초의 허준드라마 ‘집념’으로 나타났다. ‘집념’의 허준이야기는 99%가 작가 이은성의 창작이다. 드라마 ‘집념’이 방송되자 사람들은 우선 TV드라마의 격조와 품위에 대해 새삼 놀랐다.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극적구성과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숨을 죽이고 몰입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의학에 대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해박한 지식과 정보까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고 유익한 드라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집념, 집념’이었다. 덕분에 극중 ‘허준’역을 맡은 성우출신의 탤런트 김무생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나중에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2013년에 네 번째 드라마로 만든 일일연속극 ‘구암 허준’에서는 김무생의 아들 김주혁이 아버지가 맡았던 ‘허준’역을 맡아 열연했다. TV드라마만 네 번 제작된 셈이다. ‘집념’ ‘동의보감’ ‘허준’ ‘구암 허준’ 등이었는데, 특히 그 가운데 최완규가 각색한 ‘허준’은 완벽한 국민드라마로 등극했었다. 탄탄한 원작에다 시대와 제작여건에 맞게 만들어 온 국민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허준스토리의 흥미진진함을 실감케 해주었다. 허준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이은성원작의 ‘허준’을 능가하지 못했다. 한의학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 때문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작가 이은성의 집착과 창작력 때문이었다. 그만큼 드라마로서의 ‘허준’에는 이은성의 땀과 노력이 스며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이야기들로 가득 찬 드라마였다. 허준은 반쪽짜리 양반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쫓겨 경상도 산음(지금의 산청)까지 흘러간다. 반쪽짜리 양반이란 아버지가 양반이고 어머니는 노비신분으로 조선시대와 같은 계급사회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른바 출세할 길이 없었다. 아버지가 양반이고 어머니가 천한 신분인 첩 사이에서 태어난 허준은 밀거래 물건이나 빼앗는 건달로 살다가 쫓겨 어머니와 함께 몸을 피하며 흘러 다닌다. 그 과정에서 멸문한 양반집 규수를 위기에서 구해 함께 경상도 땅 산음(지금의 산청)까지 내려와 숨어 산다. 반쪽 양반의 신분으로 양반 댁 규수를 아내로 맞게 된 사실과, 밀거래 꾼으로 지목된 과거가 나중에 발목을 잡고 위기를 몰고 오는 결정적 사안이 되기도 한다. 처음 허준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거리를 찾다가 그 산음지방에서 소문난 의원 유의태 집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의술의 중요함에 눈을 뜨고 의원이 되었으면 하는 꿈을 갖는다. 물지게를 지고 약초에 관심을 갖고, 기회가 주어지자 남다른 안목으로 환자를 돌보고 약재를 고른다. 하지만 허준의 이 같은 노력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견제와 모함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꿈이 자라는 만큼 시련과 고초는 점점 더 가중되고, 그중에서도 특히 의원 유의태를 보필하며 장래 큰 의원이 되고자 하는 유의원 아들의 견제가 가장 극심하다. 이미 아버지 유의태의원으로부터 허준이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 사이사이 허준이 겪는 크고 작은 시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훌륭한 의원이 되기 위해 스승 유의태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의술 못지않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원으로서의 자질과 인품을 착실히 갖춰나간다. 드디어 궁중 내의원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을 볼 기회가 와 어렵게 준비해서 길을 떠난다. 하지만 한양으로 상경하는 도중에 역병(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광경을 본 허준은 과거 보는 건 뒷전이고 병자들을 돌보느라 시험기간까지 넘긴다.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의 패턴

겨우 역병이 수습되자 그땐 이미 늦었다. 그에게 내의원의 벼슬이 주어지는 기회는 불가피하게 늦춰졌다. 병자의 신분이나 계급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의원은 오로지 생명의 소중함을 중히 여기는 직분임을 스승 유의태로부터 배워 나간다. 그가 스스로 내의원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하기 전 스승 유의태는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그리고는 허준을 몰래 데리고 산속 깊은 동굴로 들어간다. 스승 유의태는 마지막으로 허준에게 당부한다. 자기가 죽으면 자기 몸을 해부해 구석구석 눈으로 확인해보라고.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원이 어찌 인체내부를 모르고 병자를 고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굳이 자신의 신체를 해부해 일일이 확인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는다. 이 일로 허준은 사람의 신체내부를 직접 세세히 확인해본 당시로서는 유일한 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후 허준은 궁중의 내의원에 들어가고, 다시 숱한 궁중 내 파워게임으로 인한 고초와 시련을 극복하며 마지막 단계인 임금의 주치의, 즉 어의(御醫)가 된 뒤에도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결국 ‘동의보감’이라는 한의학이 집대성 된 의서(醫書)를 편찬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어떤 목표를 향해가는 과정에서 끝없이 시련에 봉착하고, 마지막까지 위기를 맞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드라마의 한 전형적인 패턴을 이뤄낸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드라마가 방송되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면서 허준의 고행이 성공으로 이어지길 기원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무려 네 번이나 드라마로 만들어 방송되는 사이 첫 번째 원작이 된 ‘집념’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세 번째로 만든 드라마 ‘허준’에 와서는 평균 시청률이 60%를 넘나들었다.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국민드라마가 탄생한 것이다.
명실공이 국민적 드라마로 각광을 받았다. 한의학과 약재에 대한 풍부하고 해박한 지식과 의원으로서의 귀감이 될 만한 올바른 자세, 그리고 한 인간의 삶과 인생이 녹아있는 드라마로 ‘허준’은 일약 드라마의 한 고전으로 남았다. 이 드라마 ‘허준’ 속에 나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순전히 작가 이은성이 만들어낸 인물이다. 올곧은 의원의 표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실현하는 휴머니즘의 상징으로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허준’에서의 의원 유의태는 마치 실존했던 것처럼 그 어떤 극중 인물보다 감동적이었고 신선했다. 이것이 곧 작가의 역할인 것이다. 작가 이은성은 이 화제의 드라마 원작이 되는 ‘집념’ 이후에도 십년도 더 넘게 텔레비전드라마를 썼다. ‘거상 임상옥’을 비롯해 ‘소나기’ ‘의친왕’ ‘등신불’ ‘고산자 김정호’와 ‘토정 이지함’ ‘동리 신재효’까지. 주로 역사 속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본질을 추구해나가는데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 특히 ‘등신불’ 같은 드라마는 1981년에 비로소 컬러시대를 맞아 제작되면서 TV드라마의 질과 예술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 중반에 KBS-TV의 ‘개국’과 ‘정선 아라리’를 썼고, 1986년에는 그의 유일한 현대물이라 할 수 있는 KBS-TV의 일일연속극 ‘여심’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 현대물 일일극의 집필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영역을 한번 넓혀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겠는데, 역시 일상생활 극 보다는 자신은 테마가 강한 드라마에 더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탤런트 김희애가 발탁되었다. 작가 이은성은 그 숱한 드라마들을 대부분 방송사 작가실에서 끙끙대며 썼다. 따로 집필실을 마련한 것도 아니었고 여관이나 호텔 등지를 전전하며 쓰는 것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리고 기한 내 원고가 나오지 않을 때는 마치 예의 그 새벽의 도망자처럼 행방을 감춘 채 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에 관한 욕심이 유난히도 많았다. 잠시라도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다.
베스트셀러 ‘소설 동의보감’과 미완성 특집극 ‘아리랑’

드디어 1988년 서울올림픽 특집극 ‘아리랑’을 맡아 쓰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은성은 드라마 ‘허준’의 원작을 소설로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이 드라마로 된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드라마가 소설로 다시 태어난 예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드라마를 소설화 한 것이 베스트셀러가 된 경우는 아마도 ‘소설 동의보감’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전후무한 일이었다. ‘소설 동의보감’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 어떤 인기소설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불티나게 팔리면서 드라마 ‘허준’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됐다. 한의학에 관한 따분한 이야기일 거라는 통념을 깨고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극적인 장치가 쉴 틈 없이 전편에 깔려 있으니 독자들은 그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어 했다. 일반적으로 보아온 소설에 비해 워낙 흥미진진하게 짜여 진 드라마를 소설로 바꿔놨으니 얼마나 재미가 있었겠는가. 거기다 해박한 한의학과 한약재에 관한 풍부한 지식까지. 군더더기 없이 쭉쭉 뻗어나가는 드라마 적인 이야기는 이미 나와 있는 소설 가운데서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어쩌다 가끔 인기드라마를 소설로 내놓아도 드라마만큼 주목을 끄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소설 동의보감’만은 달랐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우리 소설에서 ‘소설 동의보감’ 만큼 풍부한 서사구조를 못 만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연속극 한편의 원고 분량은 그 어떤 장편대하소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방대하고 많다.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분량이다. 그 속에 심리묘사나 지문(설명묘사)이 많은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온통 움직임과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소설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지문과 대사로 표현되는 이야기들로 원고지를 채우는 것이 드라마, 특히 연속극이니 그렇다. 그걸 다시 소설로 옮겼으니 사람들은 그 풍부한 스토리텔링과 박진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많은 원고분량을 작가 이은성은 대부분 방송사 작가실에서 써서 넘겼는데, 방송사 작가실이란 집필을 위한 장소이긴 하지만 그 분위기는 때로 시장바닥 같은 곳이다. 여기저기서 떠들고 바둑도 두고, 한쪽 구석에선 큰소리로 환담도 하고 전화기에다 대고 고래고래 고함도 지르는 그런 곳이다. 책상은 누구 임자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나 급히 쓸 것이 있으면 앉아서 쓰면 되는 싸구려 책상이 벽을 보고 옆으로 쭉 놓여있다. 그 싸구려 책상 하나를 끌어안고 작가 이은성은 그 숱한 드라마도 썼고 ‘소설 동의보감’도 썼다. 작가의 일이란 늘 일정치가 않다. 월급쟁이들처럼 출퇴근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일이 없을 땐 빈둥거리지만 원고작업에 쫓길 땐 며칠이고 밤을 새는 것이 예사였다. 특히 방송원고는 시간을 다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끝날 때까지 숙식을 방송사 작가실에서 해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이 끝나고 나면 집으로 가든 술집으로 가든 흩어져 간다. 일이 없는 동안 이은성은 당시 방송사들이 몰려있던 여의도를 떠나 주로 신촌 부근에서 혼자서 마시거나 술친구를 불러내 둘이서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쩌다 작가실 동료들과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저 충청도 서해의 섬에 바다낚시를 다니기도 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고기를 많이 낚고 싶어서 누구보다 낚시에 몰두하기도 했고, 원고가 뜻대로 써지지 않을 땐 꺼이꺼이 울기도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다음 작품을 생각할 줄도 알았다. 늘 일에 매달려 사는 편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늘 쓰는 일에 배고파했다. 그런 그가 드라마 ‘허준’을 소설로 쓰면서 서울올림픽 기념 특집극을 쓰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무리는 분명 화근이었다. 평소 건강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욕일 뿐 신체적으로는 이미 진이 빠져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며칠 밤을 새던 어느 날, 뜨거운 그의 심장이 갑자기 멈췄다.
가슴으로 쓰던 작가 가슴으로 떠나다

별로 많지도 않은 머리숱이라도 보통의 경우 빗어 다듬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이은성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들여다보고 일부러 헝클어버리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료작가 한 사람과 술을 마시다가 문득 그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그동안 술 너무 마셨어. 내 이번에 작품 하나 만들어낼게!”
그때가 1988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기로 되어있던 해였다. 서울올림픽 기념특집극 ‘아리랑’을 쓰기로 KBS와 계약을 맺은 직후였다. 마음먹고 걸작을 하나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없이 이번에는 따로 호텔방을 잡아 거기서 쓰기로 했다. 그러나 난생 처음이랄 수 있는 그의 호텔방에서의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야심찬 서울올림픽 기념특집극 ‘아리랑’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1988년 1월 30일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심장수술에 들어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심장은 다시 뛰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심장으로, 가슴으로 드라마를 쓰던 작가 이은성의 심장은, 가슴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향년 54세, 한창 더 써야 할 나이였다. 그 이듬해에는 드라마 ‘집념’(허준)을 다시 문어체로 바꿔 소설로 쓴 문제의 ‘소설 동의보감’ 상, 중, 하 세권이 책으로 나왔다. 그때는 이미 앞서 나온 ‘소설 동의보감’ 상권과 중권이 수백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중이었다. 사실은 작가의 사망으로 미완성인 채로 간행된 책이었지만, 그 책이 팔려서 그나마 유가족을 지키는 밑천이 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작품 속 ‘독 짓는 늙은이’였고 ‘심마니’였으며, ‘등신불’이었고 ‘집념’의 허준이었다. 매 드라마마다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쓰는가.”라는 너무나도 명확한 주제를 물고 늘어졌으며, 최소한의 그런 의식이나 생각 없는 자세를 그 스스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더욱 힘들게, 힘들게 드라마를 썼던 한 작가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걸작 드라마 ‘허준’은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재활용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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